카테고리 없음2013. 6. 7. 15:52

(성공하는 사람들의) 대학생활백서

대학생활 백서 
칼 뉴포트| 이영선| 한언 | 2005.10.20
원제  How to win at college | 페이지 227 | ISBN  8955962797|

 

이 책은 내가 대학교 입학 전에 친구에게 선물받았던 책이다. 맨 앞페이지를 펴보니 친구가 격려의 말까지 써놓았다.(감동) 당시엔 내용을 대충 훑어보고는 별로 공감이 가는 부분이 없어서 (그래봐야 갓 졸업한 고등학생이었으니까..) 책을 덮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에와서 책장에 꽃힌채 먼지만 수북하던 이 책을 다시금 꺼내보게 되었던 건 이제 졸업을 한학기 앞둔 상황에서 지금까지의 내 대학생활과 소위 말하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대학생활이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 신입생의 개강 첫 주

나는 개강 첫 주에 뭘했던가... 아마 개강총회에 가서 주량도 모르는 미성년인 주제에 참이슬로 병나발을 불고 있었던 것 같다. 아마 필름도 여러번 끊겼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깡으로 거의 치사량에 가까운 양의 술을 그렇게 마실 수 있었는지도 신기하다. 나는 초중학교를 다니는 동안 내내 바이올린을 배웠으므로 자신감있게 관현악부에 지원신청서를 냈다. 그러나 처음 동아리방에 갔을 때의 그 뻘쭘함..(동기 중에는 악기를 다루는 사람이 없어서 혼자 갔었다)나는 참지 못하고 도망치고 말았다. 그 이후로 정모 공지가 여러번 문자로 왔었지만, 시험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더니 3주만에 제명이 되었다. 자업자득. 그 후로는 공부에 큰 뜻을 품고 책에서 말하는 '보이지 않는 1학년' 으로서 도서관에서 은둔생활을 했다. 그것이 나쁜일은 아니었지만, 대학생으로서 썩 재미있게 지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직도 그 꿈같은 시절에 대한 미련이 많이 남아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혹시라도 이 글을 보는 대학 1학년 새내기가 있다면, 내 말을 따를지어다. 열심히 공부한 당신, 공부는 적당히만 하고 어디로든 떠나라!

 

- 공강시간을 만들지 않는다

시간표를 짜다보면 공강시간이 생기기 마련인데, 이 파트의 요지는 그 비는 시간을 알차게 보내라는 의미이다. 나의 경우도 현재 전공으로만 12학점을 듣는데, 여유롭다고 할 수는 없지만 공강시간은 좀 많다. 그러나 공강시간엔 왜이렇게 게으름을 피우고 싶고, 낮잠을 자고 싶고, 노래 한곡 하러가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다. 그 잠깐의 시간동안 점심을 먹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 때는 너무나도 즐거워서 가끔은 다음수업 직전까지 떠드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이 시간대는 '유혹의 손길' 이 많은 시간인데, 책에서는 이 시간을 잘 활용하여 그 날 처리해야 할 잡일들을 해결하라고 조언한다. 공강시간을 빈둥거리게 되면 오전에 기상하면서 얻은 '하루를 보낼 에너지'를 소진하고 만다. 확실히 이 말에 공감을 하는데, 그래서 난 점심시간에 낮잠을 자기 보다는 헬스장에 간다. 운동을 하고 나면 오전에 행여나 골치아팠던 문제와 씨름했더라도 운동을 하면서 잊을 수 있고, 충분한 산소를 두뇌에 공급해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 불가능한 일은 없다.

"성공적이고 즐거운 대학생활을 보내는 학생들의 타입은 참으로 다양하다. 그러나 그 수많은 학생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가능성을 예측하는 놀라운 감각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교과과정을 끝내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데 반해, 성공적인 학생들은 커다란 목표를 세워두고 거기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그들은 이전에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일들을 하면서 짜릿한 전율을 느낀다. ... 누구보다 뛰어난 대학생활을 보내고 싶다면, '불가능한 일은 없다'는 태도를 길러야 한다"

이건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욱 실천하기가 힘든 일이다. 나름 학교에서 꼬꼬마로 취급받던 시절, 18학점을 들으면서 소설도 쓰고, 교육봉사도 하고, 교내 게임리그에 참가도 하고, 독서모임에도 참가하면서 동시에 6명의 과외학생을 두었던 적이 있었다. 심지어 그 학기에 장학금까지 탔으니, 확실히 다양한 활동을 하는 것이 성적에도 긍정적 효과를 주는듯 싶기도 하다. 그 땐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과 주머니가 든든했기 때문에.

안타까운 것은 요즘은 무엇을 하려고 하면 먼저 간을 보게 되어서, 대체로 계획했던 일에 착수하기도 전에 단념하고 마는 것 같다. 전공이 어려워지고 취업준비니, 대학원 준비니,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도 본인은 사실 알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환경에 노출되는 것이 스스로에게 점점 힘겨운 일이 되어가고 있음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에서 말하는 성공적인 대학생이 되기 위해 이번 방학도 각종 색다른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마음은 좀 늙었어도 해볼만한 건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덕분에 그나마 버티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 '오늘의 할 일' 목록을 만들지 말자.

"대학생들이 시간관리를 위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규칙이 있는데, 바로 '오늘의 할 일' 목록을 만들어봤자 대학생활에서는 별다른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자신이 전날 계획한 대로 다음날 토시 하나 빼놓지 않고 실천하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이다. 전날의 우선순위와 당일날의 우선순위는 달라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오늘 시험 공부를 하자고 마음을 먹었지만, 갑자기 옛여인에게 연락이 와서 만나자고 하면 도서관에서 공부나 하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처방을 내린다. "매일 아침 첫 수업을 듣기 전, 줄이 그어져 있는 빈 종이를 하나 준비하자. 그리고 왼쪽에 기상시간에서부터 취침시간까지의 시간을 적어둔다. 7시, 8시, 9시 , ... , 이런 식으로 두 줄에 한 시간씩 넉넉하게 적은 다음, 확실한 스케줄부터 표시한다. 일단 오늘의 수업시간을 표시하고, 밥먹을 시간, 팀프로젝트 미팅시간 같은 것들을 표시하고 나면, 남아있는 흰 공백은 하루 동안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을 뜻한다. ... 아침에 적은 이 종이를 저녁까지 가지고 다니면서 하루의 일정을 조정하도록 한다."

최근 다이어리를 가지고 다니면서 위의 시간표를 만들어서 가지고 다니는데, 사실 다른 것 보다도 내가 그날 무슨 일을 했었는지 구체적으로 적을 수 있어서 훗날 참고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더 큰 것 같다.

 

-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을 찾아서

"지루함에서 탈출하기 위해 적극적인 자세로 예측 불가능한 상황과 모험을 계획하는 것이 중요하다. 원래 즐거움이란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것인데 미리 '계획'을 세운다는 것이 어울리지 않은 일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루하게 토요일 오후를 보내는 것보다는 유용할 것이다. 친구들을 모아 주말마다 친구들의 집이나 기숙사를 순회하며 파티를 열거나, ... 계획없이 무작정 버스를 타고 여행을 떠난다거나, 새벽 4시에 영화를 보러가고,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동네 다방에 가본다거나, 도서관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 인사하고, 혼자만의 파티도 여는 등 그 나이의 학생들만 할 수 있는 멋진 사건을 만들어보자!"

나는 일상에 지칠 땐 자전거를 타고 한강으로 나가곤 한다. 그렇다고 무작정 빡세게 자전거만 타는 것이 아니고, 남양주 방향으로 가는 자전거 도로를 타고 가다가 좋은 풍경이 보이면 잠깐 앉아서 바람도 쐬고, 그동안 바빠서 연락하지 못했던 친구들에게 전화도 한다. 그리고 돌아올 땐 자전거도로가 아닌 시내를 통해 돌아오면서 처음 보는 동네 구경도 하고, 마트에 들러서 음료수도 사 마신다. 동네에 돌아오면 어느새 해질녘이 되는데, 귀가하기 전에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라든지, 중,고등학교에 들러서 스탠드에 가만히 앉아 옛 생각을 추억하곤 한다. 20대 초반에는 불금이면 어김없이 시끌벅적하게 술판을 벌여놓고 밤을 새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요즘에는 조용히 혼자 자전거로 돌아다니면서 사색을 즐기는 것이 더 즐겁고, 때론 뭉클하기도 하다.

 

 

 

결국 성공하는 대학생이란 관심있는 분야에는 언제든지 총력을 기울여 시간투자를 하고 성과를 얻어낼 수 있는 대학생을 말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할 때도 자기만의 시간관리법, 자신만의 노트필기법, 자신만의 내용이해방식을 만들어서 사소하지만 창조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이 글의 저자는 다트머스 칼리지를 최우수 장학생으로 졸업하고, MIT에서 박사과정을 밟고있는(지금이면 Post-Doc 일지도..) 수재다. 그들과 나의 가장 큰 차이점은,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 대학생들은 사실 미국의 대학생들보다도 취업에 대한 압박이라든지, 남자의 경우 군대문제 등등으로 인해 대학생활이 좀 덜 여유로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적어도 내 자신에 대해 말하자면, 한국의 대학생은 빡빡하고 근면성실하게 살아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실제로 힘들지 않은 상황에서조차도 스스로를 옥죄도록 만드는 것 같다. 심하게는, 별로 하는 것도 없이, 그냥 분위기에 휩쓸려 <힘든 것 같다>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런 일련의 의식들이 흥미를 포기로까지 이어지게 만든다. 그러나 위에서 저자가 말하듯 무엇이든 불가능이란 없다고 생각하며 이것저것을, 제대로, 해보려고 노력한다면, 그리고 거기서 어떤 작은 성과라도 얻게 된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자신의 인생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시각이 얼마나 좁고 편협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될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매일매일을 새롭게 사는 것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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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2013. 5. 23. 23:30

(한권으로읽는) 조선왕조실록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박영규 저  |  웅진닷컴  |  2004.11.18  |  페이지 546  ISBN  8901047543

 

최근 SBS에서 방영 중인 <장옥정, 사랑에 살다> 를 보기 시작했는데,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리게 된건 다분히 이 드라마 때문이다. 덕분에 별로 관심도 없었던 한국사 시험에 대해서도 알아보고있으니 스스로 대견하다며 자찬하고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고등학교 때 배운 국사내용도 거의 다 잊어버려서, 책을 읽으면서 익숙했던 내용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다 새로배운 느낌.

조선왕조실록은 제1대 왕인 태조의 실록으로 시작하여 27대 왕인 순종의 실록으로 마무리가 된다. 이 책은 주로 각 시기의 왕들이 왕위를 물려받거나 찬탈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정치적 대립세력간의 갈등과 원인, 결말을 요약하여 소개하며 왕을 포함하여 각 시대를 빛낸 신하들이 세운 업적등을 간략하게 다룬다. 정말 가볍게 읽혀서 하루만에 다 읽었다. 물론 이 내용으로 시험을 친다고 하면 좀 더 공부를 해야겠지만, 나처럼 고등학교 국사가 아른거리는 불쌍한 영혼들은 하루 날잡고 이 책에 빠졌다 나오면 뿌듯한 느낌이 들지도. 한동안은 역사스페셜로 다음 리뷰에서는 5.18 광주민주항쟁에 대한 책을 리뷰해보려고한다.(읽는중..)

 책 내용을 대략적으로 요약해볼까 한다. 

 

1. 조선의 개국, 그리고 피바람 부는 왕조

고려 말기 공민왕은 원나라 순종으로부터 무력진압의 압박을 받으며 왕위 보전에 위협을 느꼈고, 당시 여진의 남경에서 기반을 닦고 있던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과 합심하여 원에 대항하기로 한다. 이성계는 어린 시절부터 문무가 뛰어나기로 유명했고,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전쟁을 통해 이름을 알리게 된다. 아버지가 죽은 이후 사병을 육성하여 동북면 지역에서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가면서 고려 변방을 지키는 주역으로 성장하게 되고, 1362년 원의 나하추가 이끄는 수만의 군사를 무찌르면서 공민왕의 전폭적인 신임을 얻게된다. 그는 당시 경상도, 전라도에 창궐하던 왜구를 크게 물리치기도 하였다. 1388년, 수상격인 문하시중 바로 아래인 수문하시중이 된 그는 명나라가 고려를 속국으로 삼으려는 행태에 반발한 고려 정부의 지시로 명의 요동 정벌에 나선다. 그러나 위화도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요동을 정벌하려던 이성계는 압록강의 물이 불어나 강을 건널수 없었고, 사불가론을 위시하여 고려 정부에 정벌이 불가함을 주장했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위화도 회군을 감행하여 군사를 통해 정부를 장악한다. 그리고 1392년 7월 공양왕을 내쫓고 정도전, 조준, 남은, 이방원 등의 추대를 받아 고려 국왕으로 등극했다. 그는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고 수도를 한양으로 옮겨 조선을 개국하게 된다. 그러나 이방원(정안대군)에 의한 제1차 왕자의난,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조선왕조는 시작부터 피비린내나는 왕권 찬탈과 정치세력싸움에 휘말리게 된다.(태조-정종-태종)

2. 세종의 왕도정치와 조선의 영화 , 또다시 부는 피바람.

1418년 6월 태종의 셋째 아들 충녕은 왕세자에 책봉되고 두 달 후인 8월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한다. 조선의 제4대 왕 세종은 조선 역사상 가장 훌륭한 유교정치와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웠을 뿐만 아니라 후대에 모범이 되는 성군으로 기록되었다. 태종이 이룩해놓은 왕권의 안정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전반에 걸쳐 기틀을 확립한 시키였다. 집현전을 통해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고,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제도가 정비되었으며,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 사업이 이루어져 문화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훈민정음의 보급, 농업과 과학기술의 발전, 의약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의 제정, 국토의 확장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민족 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다져나갔다.

과다한 업무에 시달려 건강이 악화된 세종은 왕세자인 향을 통해 8년간 섭정을 하게되고 1450년 2월 세종이 죽은 후 향은 왕(문종)으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세자 시절 업무 과중으로 건강이 악화되어있던 문종은 아버지와 같이 재위기간의 대부분을 병상에서 보내야했다. 따라서 많은 후사를 내지 못하였고 어린 세자 홍위를 남긴채 즉위 2년 3개월 만에 병사하고 만다.

한편 세종과 단종이 병으로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동안 세종의 다른 아들들의 세력이 팽창하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겨우 12살에 왕위에 오른 단종이었기 때문에 왕권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은 어린 왕을 보필한다는 명목으로 정치권에 뛰어들었고 1453년 10월 계유정난을 일으켜 자신과 척을 지고 있던 김종서 및 조정 대신들을 피살했다. 수양은 왕의 측근들까지 죄인으로 몰아 유배시켰고, 이에 위험을 느낀 단종은 왕위를 내놓고 상왕으로 물러나게 된다. 결국 단종은 17세의 나이로 사사되고 만다. 그리고 수양은 스스로 왕위에 오르게 되니 그가 바로 제7대 왕 세조이다.

3. 세조의 강권정치와 문치의 후퇴

세조는 내용에 상관없이 자신을 비판하는 세력은 가차없이 제거하고, 반대로 자신에게 복조아는 인물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했다. 그는 철저한 측근정치를 펼쳤는데 특히 왕이 지명한 삼중신(한명회, 신숙주, 구치관)이 승정원에 상시 출근해 왕자와 함께 모든 국정을 상의해서 결정하는 원상제를 실시하였다. 그는 1468년 9월에 왕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그 다음날 죽게된다. 세조의 정치는 왕권 강화에 기여한 면은 있지만, 정치 문화에서는 무단 강권 정치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저급한 수준을 보이고 있다.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는 세조가 즉위하자 18세의 나이로 즉시 세자로 책봉되어 왕위 계승 수업에 들어갔지만, 2년 뒤에 별 이유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하고 만다. 결국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었던 해양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었고, 19세의 나이에 세조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수강궁에서 즉위하였으니 그가 예종이었다. 그러나 그 또한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아 1년 2개월이라는 짧은 재위기간을 끝으로 운명을 달리하였다. 게다가 그가 성년이 아니었기 때문에 모후인 정희왕후의 섭정과 원상제도에 의한 두 가지 형태의 지원을 받으며 왕권을 행사해야 했으니, 왕권이 미약할 수 밖에 없었다.

4. 성종의 도학정치와 조선의 태평성대

예종이 죽던 날 정희왕후 윤씨는 자신의 장자인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을 왕위에 앉혔다. 조선 역사상 왕이 죽은 날 바로 다음 왕을 앉힌 예는 없었기에 조정 대신들은 논란을 일으켰지만 정희왕후의 뒤에는 한명회, 신숙주 등의 권신들이 버티고 있었기에 아무 저지도 하지 못했다. 결국 조선 제9대 왕으로 13세의 자을산군(성종)이 결정되었다. 성종이 성인이 되어 정희왕후의 7년 간의 수렴청정이 끝났지만, 성종은 치세에 능해 권신을 견제하기 위해서 사림 세력을 끌어들여 권력의 균형을 이룸과 동시에 유교사상을 더욱 정착시켜 왕도 정치를 실현해 나갔다. 그는 원상제도를 폐지하여 왕명 출납과 서무 결재권을 되찾았고, 훈신과 사림 간의 세력 균형을 이룸으로써 왕권을 안정시켰다. 또한 성리학의 발전에 박차를 가하면서 불교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였다. 고려부터 조선 초 까지 1백여 년간에 걸쳐 반포된 여러 법전, 교지, 조례, 판례 등을 총망라하여 세조때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이 1485년에 완성되었고, 각종 문화 서적들을 편찬해 민간 생활의 질을 높였다. 또 성리학자들을 정계에 진출시켜 학문과 정치를 하나로 묶었으며, 조선의 정치이념인 유교를 완전히 정착시켜 민간 교화에 성공했다. 게다가 변방의 야인을 토벌하여 전쟁의 위협을 없애고, 남방의 왜구들은 외교적으로 관리하며 지배하였다. 이는 민생의 안정과 태평성대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말년에 왕비 윤씨가 그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는 폐비 윤씨 사건이 나게되고, 이후 연산군 대에 이르러서 갑자사화로까지 번지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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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2013. 5. 16. 20:18

[특집편] 유명한 패러독스들 - The important paradoxes

 

독서경시대회도 끝나고, 2차시험도 끝났지만 시험공부 한다고 다른 책을 전혀 접하지 못한 탓에 이번에는 리뷰 대신 평소 정리해두고 싶었던 내용을 기록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학문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주목할만한 다양한 논리적 역설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실질적으로 이런 역설들에 의해 논리학은 무궁무진한 발전을 이루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아주 흥미로우면서 어렵지 않은 내용들이므로 심심풀이 땅콩으로 유식한 척 하기엔 딱 좋다. (물론, 내가 그런걸 즐긴다는 건 아니다)

 

1.  러셀의 패러독스 (1902)

아마도 논리학을 접하지 않은 일반인조차도 이 러셀의 패러독스나 이것의 변형된 버젼을 어디선가 접해봤을 것이다.

러셀의 패러독스의 형식적 버젼을 쓰기 전에 이해하기 쉽도록 예를 들어보자.

안암동에 사는 한 이발사가 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이발을 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이발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면 그는 자기 자신을 직접 이발하는 사람인가?  --- (*)

만약 그가 자기 자신을 직접 이발한다고 가정하면, 그는 직접 이발을 하지 않는 사람에 해당되므로 모순이 발생하고, 그가 자기 자신을 직접 이발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그는 그 자신을 이발해야만 하는 모순이 생긴다.

단순해 보이는 위의 (*)문장은 논리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위의 문장을 수학의 집합을 이용하여 표현하면 다음과 같이 러셀의 패러독스 형식적 버젼을 얻는다.

\text{let } R = \{ x \mid x \not \in x \} \text{, then } R \in R \iff R \not \in R

R이란 집합이 위와 같이 자기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모든 집합을 포함하는 집합이라고 가정하면 R은 자기자신에 포함되면서 동시에 포함되지 않는 모순이 발생한다. 다시 말하면, R이 자기 자신에 포함된다고 가정하면, R의 성질에 의해 R은 자기자신에 포함되지 않아야만 하고, R이 자기자신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다시 R의 성질에 의해 R은 자기자신에 포함되는 집합이 된다.

이 러셀의 패러독스는 수학자 버드런트 러셀이 집합론 연구 중 발견한 논리적 역설로, 이로 인해 20세기 초에 대두된 소위 '수리기초론' -- 수학을 견고한 논리(그 당시, 집합론) 위에 다시 세우려는 일련의 시도들 -- 은 시작되기도 전부터 풍비박산이 날 지경이 되었다.

그러면 러셀의 패러독스가 나오는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이 있을까? 만약 많은 수학자와 논리학자들이 러셀의 패러독스를 극복하지 않았다면 무슨 근거로 우리는 현대 수학을 믿음직스럽다고 할 수 있었을까? 다행히도, 매우 단순한 방법으로 러셀의 패러독스를 극복(여기서는, 피해간다는 표현이 맞을듯 싶기도 하다)하는데, 그것은 위의 러셀의 패러독스의 형식적 버젼에서 등장하는 R과 같은 집합을 집합으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서 러셀의 패러독스 및 그 비스무레한 논의들(자기 자신을 언급하는 일련의 패러독스들)을 집합론으로부터 배제시키는 것이었다. 우리의 직관은 "모여있는 모든 것"을 뭐든지 집합으로써 인식할 수 있지만, 이것이 현실화되었을 때 그 집합의 존재를 관철시키는 것은 그리 녹록치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이미 직관과 논리의 gap은 다소 구체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역설은 논리에서 문제가 되는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언급' 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2. 칸토어의 패러독스 (1899)

주어진 두 집합이 A = {1,2,3,4} , B = {5,6,7,8}과 같이 유한집합일 때, 우리는 A와 B의 원소의 개수를 셈으로써 A와 B가 같은 개수의 원소를 갖고 그러므로 두 집합의 크기가 같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러면 주어진 집합들이 무한인 경우는 어떻게 두 집합의 크기를 비교할 수 있을까? 단지 '둘다 무한이니까 어떤 것이 더 많은 원소를 가지는지는 알 수 없다' 고 말할 수도 있지만, 우리의 직관은 종종 그 이상을 암시한다. 예를 들면, 모든 자연수의 집합을 N이라고 하고 모든 유리수의 집합을 Q라고 하면, N은 Q에 속하고, N에 있지 않은 수많은 원소들(이를테면, 분수꼴의 수들)이 Q에 속해있기 때문에 Q의 집합의 크기는 N보다 크다는 걸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Q와 N은 모두 무한집합이라는 것을 주목하자. 우리는 방금 다음과 같은 명제를 참이라 생각하고 사용했다.

"A가 B에 속하면 B의 크기는 A와 같거나 더 크다."

이 명제는 확실히 A와 B가 유한집합일 때는 맞는 이야기이다. 원소의 개수를 일일이 세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명제가 무한집합에 대해서도 맞는지는 알 수 없다. 집합의 원소가 무한히 많기 때문이다. 19세기 수학자 칸토어가 세운 업적 중 가장 위대하게 평가받고 있는 것은 이러한 무한집합의 크기를 비교하는 방법론을 제시했던 일이다. 그 방법론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 보였던 예시로 돌아가보자. A = {1,2,3,4} , B = {5,6,7,8} 로 주어져 있을 때, 두 집합의 크기를 비교하기 위해서는 앞서 보았듯이 두 집합의 원소의 개수를 세볼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방법이 있다. 두 집합의 원소를 둘씩 짝지어보자. 예를들어, 1과 5, 2와 6, 3과 7, 4와 8 을 서로 짝지으면 A와 B의 원소는 모두 빠짐없이 짝지어지게 된다. 한편 A = {1,2,3,4,5} , B = {5,6,7,8}로 주어져있고 방금과 같이 짝을 짓는다고 생각하면, A의 원소인 5는 B의 어떤것과도 짝지어지지 못하기 때문에, A의 크기가 B보다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단순해보이는 방법론이 무한집합의 크기를 비교하는데 이용된다.

모든 자연수의 집합을 N이라 하고 모든 짝수 집합을 Ne 라고 하자. 즉, N = {1,2,3,4, ...} 이고 Ne = {2,4,6,8,...}이다. 직관적으로 볼 때, N의 크기는 Ne보다 클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이 N과 Ne의 원소를 남김없이 짝지을 수 있다.

                  N                                                                   Ne

                  1                            - >                                    2

                  2                            - >                                    4

                  3                            - >                                    6                 

                  4                            - >                                    8

                ....                            - >                                  ....

그런데 왜 이렇게 짝을 지으면 서로간에 남는 원소가 없다고 확정지을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가 짝을 짓는 원소들 사이에 존재하는 규칙성 때문이다. N의 주어진 원소 n에 대하여 2n 에 해당하는 원소가 항상 Ne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짝짓기를 다음과 같이 함수를 포함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N과 Ne 사이에는 일대일대응함수인 f가 존재한다."   

이에 따라 칸토어는 집합의 상등(相等)(크기가 같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A와 B가 상등일 필요충분조건은 A와 B사이에 일대일 대응인 함수 f가 존재하는 것이다."

집합의 상등을 위와같이 정의하는 동시에 아주 신기한 일들이 발생하는데, 방금 예시에서 보았듯이 짝수 전체의 집합인 Ne 에 비해 N은 직관적으로 볼 때 두배나 많은 원소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집합은 서로 크기가 같다. 심지어 N과 Q사이에도 적절한 일대일 대응함수가 존재함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에(자세한 증명은 생략한다) N과 Q의 크기도 서로 같다. 이쯤 되면 이런 생각이 들 수 있다. '무한집합끼리는 모두 다 크기가 같은 것 아냐?'

그러나 칸토어의 대각정리(Cantor's Diagonal Theorem)에 의해 실수 집합 R은 자연수의 집합 N보다 크기가 더 크다. 칸토어의 대각정리는 시간이 허락하면 증명을 적어보기로 하겠다. 왜냐하면 증명의 내용은 중학생이 이해할 수 있을정도로 쉬운데다가 그 아이디어가 독창적이며 수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방법론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제 칸토어의 패러독스를 설명할 차례다. 칸토어는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혔다.

"임의의 집합 A에 대하여 그 멱집합(Power set) P(A)의 크기가 더 크다." --- (**)

멱집합이란 주어진 집합의 모든 부분집합을 포함하고 있는 집합이다. 예를들면, A = {1,2,3} 이라고 주어졌을 때 P(A) = { ø, {1} , {2} , {3} , {1,2} , {2,3} , {1,3} , {1,2,3} } 이다. 위의 명제 역시 당연히 유한집합에서는 성립한다는 걸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위의 명제가 무한집합에 대해서 성립하는지는 증명이 필요하다. 어쨌든, 칸토어는 어렵지 않게 위의 사실을 증명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모든 집합의 집합" 을 U라고 하자. 즉, U에는 모든 집합이 다 포함되어 있다. (**)에 의해 (1)그것의 멱집합인 P(U)는 위의 명제에 따라 자기 자신인 U보다 크기가 크다. (2)한편 U는 모든 집합의 집합이기 때문에 P(U)는 U에 속하게 된다. 

또한 임의의 집합 A와 B에 대하여 A가 B에 속하면 이 둘이 무한집합이더라도 A의 크기가 B의 크기보다 클 수는 없다는 것이 알려져있다. 그러므로 U의 크기는 P(U)보다 크거나 같다. 정리하면,

(1) [U의 크기] < [P(U)의 크기]

(2) [U의 크기] >= [P(U)의 크기]

가 된다. 서로 모순되는 결론이 동시에 도출되고 마는 것이다. 이를 칸토어의 패러독스 라고 한다.

그러면 이 패러독스는 어떻게 해결되었을까? 논리학자들은 골치아픈 문제들을 다루면서도 골치를 썩는 것을 매우 싫어하기 때문에 이번에도 역시 이 문제를 정면돌파하기 보다는 이러한 문제와 만나지 않도록 우회하는 것을 선택한다. 즉, '모든 집합의 집합' 인 U와 같은 집합을 집합으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런 집합을 논리적으로 다룰 일이 없도록 한 것이었다.

이러한 패러독스들의 첫 종착지는 대략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라고 볼 수 있다. (계속...)

Posted by Platon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