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읽는) 조선왕조실록
박영규 저 웅진닷컴 2004.11.18 페이지 546 ISBN 8901047543
최근 SBS에서 방영 중인 <장옥정, 사랑에 살다> 를 보기 시작했는데,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리게 된건 다분히 이 드라마 때문이다. 덕분에 별로 관심도 없었던 한국사 시험에 대해서도 알아보고있으니 스스로 대견하다며 자찬하고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고등학교 때 배운 국사내용도 거의 다 잊어버려서, 책을 읽으면서 익숙했던 내용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다 새로배운 느낌.
조선왕조실록은 제1대 왕인 태조의 실록으로 시작하여 27대 왕인 순종의 실록으로 마무리가 된다. 이 책은 주로 각 시기의 왕들이 왕위를 물려받거나 찬탈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정치적 대립세력간의 갈등과 원인, 결말을 요약하여 소개하며 왕을 포함하여 각 시대를 빛낸 신하들이 세운 업적등을 간략하게 다룬다. 정말 가볍게 읽혀서 하루만에 다 읽었다. 물론 이 내용으로 시험을 친다고 하면 좀 더 공부를 해야겠지만, 나처럼 고등학교 국사가 아른거리는 불쌍한 영혼들은 하루 날잡고 이 책에 빠졌다 나오면 뿌듯한 느낌이 들지도. 한동안은 역사스페셜로 다음 리뷰에서는 5.18 광주민주항쟁에 대한 책을 리뷰해보려고한다.(읽는중..)
책 내용을 대략적으로 요약해볼까 한다.
1. 조선의 개국, 그리고 피바람 부는 왕조
고려 말기 공민왕은 원나라 순종으로부터 무력진압의 압박을 받으며 왕위 보전에 위협을 느꼈고, 당시 여진의 남경에서 기반을 닦고 있던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과 합심하여 원에 대항하기로 한다. 이성계는 어린 시절부터 문무가 뛰어나기로 유명했고,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전쟁을 통해 이름을 알리게 된다. 아버지가 죽은 이후 사병을 육성하여 동북면 지역에서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가면서 고려 변방을 지키는 주역으로 성장하게 되고, 1362년 원의 나하추가 이끄는 수만의 군사를 무찌르면서 공민왕의 전폭적인 신임을 얻게된다. 그는 당시 경상도, 전라도에 창궐하던 왜구를 크게 물리치기도 하였다. 1388년, 수상격인 문하시중 바로 아래인 수문하시중이 된 그는 명나라가 고려를 속국으로 삼으려는 행태에 반발한 고려 정부의 지시로 명의 요동 정벌에 나선다. 그러나 위화도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요동을 정벌하려던 이성계는 압록강의 물이 불어나 강을 건널수 없었고, 사불가론을 위시하여 고려 정부에 정벌이 불가함을 주장했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위화도 회군을 감행하여 군사를 통해 정부를 장악한다. 그리고 1392년 7월 공양왕을 내쫓고 정도전, 조준, 남은, 이방원 등의 추대를 받아 고려 국왕으로 등극했다. 그는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고 수도를 한양으로 옮겨 조선을 개국하게 된다. 그러나 이방원(정안대군)에 의한 제1차 왕자의난,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조선왕조는 시작부터 피비린내나는 왕권 찬탈과 정치세력싸움에 휘말리게 된다.(태조-정종-태종)
2. 세종의 왕도정치와 조선의 영화 , 또다시 부는 피바람.
1418년 6월 태종의 셋째 아들 충녕은 왕세자에 책봉되고 두 달 후인 8월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한다. 조선의 제4대 왕 세종은 조선 역사상 가장 훌륭한 유교정치와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웠을 뿐만 아니라 후대에 모범이 되는 성군으로 기록되었다. 태종이 이룩해놓은 왕권의 안정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전반에 걸쳐 기틀을 확립한 시키였다. 집현전을 통해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고,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제도가 정비되었으며,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 사업이 이루어져 문화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훈민정음의 보급, 농업과 과학기술의 발전, 의약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의 제정, 국토의 확장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민족 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다져나갔다.
과다한 업무에 시달려 건강이 악화된 세종은 왕세자인 향을 통해 8년간 섭정을 하게되고 1450년 2월 세종이 죽은 후 향은 왕(문종)으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세자 시절 업무 과중으로 건강이 악화되어있던 문종은 아버지와 같이 재위기간의 대부분을 병상에서 보내야했다. 따라서 많은 후사를 내지 못하였고 어린 세자 홍위를 남긴채 즉위 2년 3개월 만에 병사하고 만다.
한편 세종과 단종이 병으로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동안 세종의 다른 아들들의 세력이 팽창하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겨우 12살에 왕위에 오른 단종이었기 때문에 왕권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은 어린 왕을 보필한다는 명목으로 정치권에 뛰어들었고 1453년 10월 계유정난을 일으켜 자신과 척을 지고 있던 김종서 및 조정 대신들을 피살했다. 수양은 왕의 측근들까지 죄인으로 몰아 유배시켰고, 이에 위험을 느낀 단종은 왕위를 내놓고 상왕으로 물러나게 된다. 결국 단종은 17세의 나이로 사사되고 만다. 그리고 수양은 스스로 왕위에 오르게 되니 그가 바로 제7대 왕 세조이다.
3. 세조의 강권정치와 문치의 후퇴
세조는 내용에 상관없이 자신을 비판하는 세력은 가차없이 제거하고, 반대로 자신에게 복조아는 인물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했다. 그는 철저한 측근정치를 펼쳤는데 특히 왕이 지명한 삼중신(한명회, 신숙주, 구치관)이 승정원에 상시 출근해 왕자와 함께 모든 국정을 상의해서 결정하는 원상제를 실시하였다. 그는 1468년 9월에 왕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그 다음날 죽게된다. 세조의 정치는 왕권 강화에 기여한 면은 있지만, 정치 문화에서는 무단 강권 정치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저급한 수준을 보이고 있다.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는 세조가 즉위하자 18세의 나이로 즉시 세자로 책봉되어 왕위 계승 수업에 들어갔지만, 2년 뒤에 별 이유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하고 만다. 결국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었던 해양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었고, 19세의 나이에 세조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수강궁에서 즉위하였으니 그가 예종이었다. 그러나 그 또한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아 1년 2개월이라는 짧은 재위기간을 끝으로 운명을 달리하였다. 게다가 그가 성년이 아니었기 때문에 모후인 정희왕후의 섭정과 원상제도에 의한 두 가지 형태의 지원을 받으며 왕권을 행사해야 했으니, 왕권이 미약할 수 밖에 없었다.
4. 성종의 도학정치와 조선의 태평성대
예종이 죽던 날 정희왕후 윤씨는 자신의 장자인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을 왕위에 앉혔다. 조선 역사상 왕이 죽은 날 바로 다음 왕을 앉힌 예는 없었기에 조정 대신들은 논란을 일으켰지만 정희왕후의 뒤에는 한명회, 신숙주 등의 권신들이 버티고 있었기에 아무 저지도 하지 못했다. 결국 조선 제9대 왕으로 13세의 자을산군(성종)이 결정되었다. 성종이 성인이 되어 정희왕후의 7년 간의 수렴청정이 끝났지만, 성종은 치세에 능해 권신을 견제하기 위해서 사림 세력을 끌어들여 권력의 균형을 이룸과 동시에 유교사상을 더욱 정착시켜 왕도 정치를 실현해 나갔다. 그는 원상제도를 폐지하여 왕명 출납과 서무 결재권을 되찾았고, 훈신과 사림 간의 세력 균형을 이룸으로써 왕권을 안정시켰다. 또한 성리학의 발전에 박차를 가하면서 불교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였다. 고려부터 조선 초 까지 1백여 년간에 걸쳐 반포된 여러 법전, 교지, 조례, 판례 등을 총망라하여 세조때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이 1485년에 완성되었고, 각종 문화 서적들을 편찬해 민간 생활의 질을 높였다. 또 성리학자들을 정계에 진출시켜 학문과 정치를 하나로 묶었으며, 조선의 정치이념인 유교를 완전히 정착시켜 민간 교화에 성공했다. 게다가 변방의 야인을 토벌하여 전쟁의 위협을 없애고, 남방의 왜구들은 외교적으로 관리하며 지배하였다. 이는 민생의 안정과 태평성대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말년에 왕비 윤씨가 그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는 폐비 윤씨 사건이 나게되고, 이후 연산군 대에 이르러서 갑자사화로까지 번지게 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