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나카 헤이스케의 <학문의 즐거움>은 내가 대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 접했던 몇 안되는 귀중한 서적 중에 하나이다. 이 책은 과거 천재 수학자, 과학자들의 재능과 면모를 찬양하기 바빴던 여타 일대기들과 달리 그 당시 내 마음에 확 와닿는 이야기들이 많이 녹아있었다. 어느 학문에서나 마찬가지겠지만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들을 보면 질투와 좌절을 느끼기 쉽다. 이 책은 먼 미래의 꿈을 향해 달리는 평범한 사람이 수많은 천재들 속에서 어떤 철학을 가지고 어떻게 그 꿈을 관철시켰는지에 관한 내용이다.
저자 소개
히로나카 헤이스케 (広中平祐 (ひろなかへいすけ), 1931년 4월 9일 - )는 일본의 수학자이다. 야마구치 현에서 태어난 그는 교토 대학교에서 학부를 마친 후,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대수기하학을 공부해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지도교수는 오스카 차리스키(Oscar Zariski)였다. 같이 동문수학했던 유명한 대수기하학자로는 데이비드 멈퍼드(David Mumford)와 마이클 아틴(Michael Artin), 스티븐 클라이만(Steven Kleiman)이 있다. (참고로 이들은 하나같이 현대 수학계의 세계적인 거장이다)
히로나카의 가장 유명하고도 중요한 업적은 1964년에 증명한 〈위수 0인 체 상에서 정의된 대수다양체의 특이점해소 정리〉로,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발간하는 수학연보(Annals of Mathematics)에 두 번에 나누어 출판되었다. 이 업적으로 히로나카는 1970년에 필즈 메달을 수상하게 된다. 일본인으로써는 고다이라 구니히코에 이어 두 번째로 필즈 메달 수상자가 되었다. 세 번째로 수상한 일본인은 모리 시게후미이며 1990년에 3차원 대수다양체의 최소모델에 대한 기여로 필즈 메달을 수상하였다. 세 일본인 수상자 모두 대수기하학을 공부한 수학자였다.
히로나카는 오랫동안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다 은퇴한 후 일본의 야마구치 대학교 학장을 거쳐, 현재는 소조가쿠엔 대학교 (創造学園大学)의 이사장으로 있다. 일본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일본의 수학 교육에 많은 기여를 했었다.
2008년 3월 서울대학교 수리과학부 석좌교수로 초빙되었다.
필즈상이란?
필즈상은 캐나다의 수학자 존 찰스 필즈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산을 기금으로 만들어진 상이다. 수학자 연맹이 4년마다 개최하는 국제 수학자 회의에서 현대 수학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을 세웠다고 생각되는 40세 미만의 두서너 수학자에게 필즈상을 수여한다. 필즈상 수상은 수학자들에게 가장 큰 영예로 여겨진다. 수학 분야의 노벨상이 없기 때문에 '수학의 노벨상'이라고도 불려진다.
히로나카 헤이스케, 그의 이야기
"세상은 넓고 천재는 많다"
나는 30년 남짓 수학이라는 학문 세계에서 살아오면서 가우스 같은 생명력이 긴 천재를 몇몇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때마다 "신은 왜 이렇게 장난을 좋아할까?" 하고 탄식하곤 했다. 재능을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주지 않은 것을 신의 장난이라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말일까?
세상은 참으로 넓다. 나는 스물여섯 살에 미국의 메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에 있는 하버드 대학에 유학 온 후부터 오늘날까지 세계 도처에서 무의식중에 오한을 느낄 정도의 천재들을 몇 사람 만나 보았다 ... 여담이지만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을 때도 같은 해에 탄생한 박사들 중에서 나는 제일 나이가 많았다. 그 중에는 나보다 일곱 살이나 아래인 스물두 살의 학위 취득자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졸업식장 한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 p24~25
"끝까지 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고등학교 시절에 장시간 걸려서 푼 문제 중에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다. ... 난 2주일 동안 다른 공부에는 일체 손을 대지 않고, 밥 먹을 때나 화장실에 갈 때나 이 문제를 푸는 데만 열중했다. ... 길을 걸어가면서도 그것만 생각하다가, 전봇대에 머리를 부딪혀서 친구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도 나에게는 대단히 귀중한 체험이 아닐 수 없다.
-p55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가 하는 것보다는 끝까지 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게 나의 신조이다. 이러한 신조가 몸에 배어서인지 나는 한 가지 문제를 택하면 처음부터 남보다 두세 배의 시간을 들일 각오로 시작한다.... 또 그것이 보통 두뇌를 가진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 -p57
"격의 없이, 그러나 거리를 두고"
지금까지의 인생을 돌이켜보면, 어떤 경우에도 마음이 맞는다든가, 의기투합할 수 있다든가 하는 것으로 친구를 선택하는 기준을 삼지 않았던 것 같다. 나에게 없는 것을 갖고 있는 친구, 무엇인가 배울 수 있는 친구를 의식적으로 선택하여 사귀어 왔다. 그 때문에 아주 친해지더라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내 안에 있는 작은 세계에 친구가 들어오려고 할 때에는 단호히 배격하려고 노력해왔다. ... 즉 아무리 친하고 존경하는 친구더라도 그 친구에게 홀딱 빠져서 나 자신을 잃어버렸던 경험은 한번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영어에 loneness(고독)와 loneliness(외로움)라는 단어가 있다. 이 두 단어의 뜻은 상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명확히 서로 대립하는 것이다. loneliness는 loneness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인간의 감정을 나타낸 말이다. loneness를 잃었기 때문에 loneliness가 생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loneness를 확고히 갖고 있으면, 좋아하는 사람이나 싫어하는 사람, 어떤 삶과 어떻게 접하더라도 loneliness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신조이다. - p81~82
"시작이 반"
뭐든지 상관없으니 하여간 논문을 쓰자고 결심한 날부터 석 달 정도 걸려서, 나는 첫 논문을 완성하여 교토 대학의 <이학부기요>(1957년 30호)에 발표하였다. ...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 논문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좋지 않았다. 제일 신랄한 것은 미국의 <Mathematical Review>라는 잡지에 실린, 당시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분교의 로젠리히트 교수의 짧은 논평이었다. ... "이 논문의 주된 결과는 그가 인용한 문헌 속에서 이미 증명된 것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것이었다. ... 파리에 유학하여 27세에 필드상을 받은 프랑스의 천재 수학자 세레(Serre)를 만났을 때도 "당신의 논문은 인용한 참고문헌에 대부분 씌어진 것이더군요."라고 지적당했다. ... 나는 그때 쥐구멍에라도 숨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혹평을 받은 논문이었지만, 역시 쓰기를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 이 졸작의 논문을 통하여 하나의 발판을 만들수가 있었다 ... 나는 이 논문을 씀으로써 자기 나름대로의 착상을 키우려는 창조의 자세를 실제 체험을 통해서 배우게 되었는데 이것이 가장 큰 성과였다.
"문제와 함께 잠자라"
나는 그동안 말 그대로 특이점 해소라는 문제와 함께 잤는데 결과적으로는 그 문제의 어려움만 깨달았을 뿐이었다. 그야말로 하면 할수록 끝이 없는 미지의 세계에 빠져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때 약간 실망스러운 일이 생겼다. 프랑스 수학계를 대표하는 슈발레(Chevalley)라는 사람이 있었다. ... 그 슈발레가 특이점 해소 문제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이점 해소의 문제가 그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다.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그것이 풀린다 할지라도 그때는 벌써 대수기하학의 일반론이 발전하여 특이점 해소의 가치가 많이 적어질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 그 후 나는 존경하던 수학자 그로센딕에게서도 사기가 꺾이는 말을 들었다. ... "4차원의 특이점 해소가 거짓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이러이러하게 하면 된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렇게 기를 죽이는 일이 겹치는 반면에 나를 격려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 자리스키 선생님은 지나가던 나를 세우고 "물기 위해서는 이를 단단히 하라"고 말하고 내 어깨를 두드리셨다. ... 새로이 결심하고 특이점 해소에 도전한 지 얼마가 지난 후에 나는 드디어 마지막 일선까지 풀어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잡았다. ...
논문이 발표되고 나서 얼마 지난 후의 일이었는데, 자리스키 선생님이 미국 수학회 회장직을 그만두면서 한 기념 강연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히로나카가 이겼다."
---------------------------------------------------------------------------------
성실함을 지키는 것은 특별한 재능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성실함이란 것이 일종의 습관이라고 생각한다. 성실한 삶에는 목표가 필요하지만 무언가를 이루어야만 한다는 강박이나 각오같은 것은 필요치 않다. 되려 너무 무겁게 생각하면 금방 지치기 때문이다. 뭔가를 하고싶으면 단지 아무생각 하지 않고 그것을 해보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날이 매일 반복되면 결과적으로 당신은 그 일에 대해 '성실한 사람'이 될 뿐이다. 한마디로 성실함은 자신이 몰두하는 일이 자신의 몸과 삶에 밴 결과 그 자체인 것이다.
당신이 하고싶은 것이 무엇인가? 그 일을 착수하여 어느정도의 성과를 얻었는가? 여러 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전혀 성과를 얻지 못했다면 스스로에게 질문하라. 그 일이 내 삶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자신에게 단 한 번이라도 준 적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성실함은 실력이 되고 실력은, 적어도 학문에 있어서는, 권력이다.
p.s. 요즘 시험이 겹치고 겹쳐서 평일날 다른 분들의 글에 코멘트를 올리지 못한 것에 대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주말에 꼭 읽고 답글 남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