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2. 26. 0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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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2014. 12. 12. 20:37
대상이 우리의 지식과 일치함에 틀림없다는 전제로부터 출발
오직 이런 방법을 통해서만 우리가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을 지닌다는 형이상학적 주장을 정당화할 수 있다.

지식의 두 종류 : 아프리오리(경험과 무관) , 아포스테리오리(경험을 통해인식)

'모든물체는 연장성을 지닌다' -> 분석판단(주어개념이 술어를 통해명확해질뿐인 명제에대한 것)
'모든 물체는 무게가 있다' -> 종합판단(술어가 주어의 내용에새로운무언가를 더함)

아포스테리오리-> 종합적임
분석적 -> 아프리오리

그러면 종합적이면서도 아프리오리한 명제가 존재하는가?
답 : 수학

철학자의 첫번째 임무 : 인간이 지닌 정신적 능력의 본성과한계를 분명히 밝히는 것

감성 , 지성(오성과이성)

이성이 경험으로부터 분리된 상태 : 순수이성

공간과 시간은 우리의 정신이 발견하는 세계 안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이 경험을 형성하면서 부여하는 일종의 틀이다.

순수 이성 비판 : 선험적 감성론 , 선험적 논리학(선험적 분석론, 선험적 변증론)



Posted by Platonism
카테고리 없음2013. 6. 21. 16:47

5.18 그리고 역사

5.18 그리고 역사

최영태 외 지음  2008.02.25  페이지 422  |  ISBN  9788987671925

 

이 책은 5.18 광주민주항쟁의 배경, 전개과정, 그리고 그것의 역사적/문화적 의의에 대해 논의한 책이다. 최근 한국사를 공부하면서 근현대사에 관심이 생겨서 고르게 된 책인데, 내가 이 책을 읽고 있으니 친구가 여러해 전에 방영했던 모 방송사의 '제5공화국'도 다시보기로 시청해보라고 했다. 아직 시간이 여의치 않아서 못보고 있는데, 주말쯤 되서 한번 연이어보기 신공을 써볼까 한다.

책은 총 3부 8개의 장으로 구성되어있으며, 제1부는 '5.18항쟁의 역사와 영향' , 제2부는 '5월운동과 문화/예술', 그리고 제3부는 '5월항쟁의 정신' 을 다루었다. 한국근현대사를 책으로 공부할 때에는 느끼지 못할 일종의 슬픔 또는 희열을 느낄 수 있다. 

이번 리뷰에서는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5.18 민주항쟁의 배경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하고, 5.18 민주항쟁의 전개과정 및 그 의의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기록해보려고 한다.

 

1. 5.18 민주항쟁의 배경

해방이 된 후 각 정치세력들은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크게 이승만을 중심으로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하려한 우익세력과 소비에트 사회주의 체제를 진정한 민주주의로 보았던 좌익세력으로 나뉘었다. 그들의 이념적 성향은 서로 달랐지만 모두 군주제가 아닌 민주적 공화제의 도입을 주장하였다.

남한에 자유민주주의 제도의 이식은 미 군정의 과도 입법의원 창설과 보통선거제의 도입으로 본격화되었다. 단일정부 수립과정에서 좌파세력 및 대부분의 우파세력이 불참한 상황에서 이승만마저 대통령제가 아닌 내각책임제 아래에서는 정부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협박하여 결국 헌법이 대통령제로 바뀌게 된다. 이로써 이승만 정부의 출범과 함께 제1공화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권력욕에 사로잡혀 1952년 및 1954년 각각 변칙적 방법으로 일인 장기집권을 시도하였다. 게다가 1960년 3월 15일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의 집권 연장을 위해 노골적으로 부정선거를 감행한다. 국민들은 이에 분노하였고 3월 15일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이 날 시위는 경찰에 의해 무력으로 진압되었으나, 4월11일 최루탄이 눈에 박힌 김주열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면서 4.19혁명이 발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전국적인 규모의 시위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4월 26일 이승만은 대통령에서 물러나게 된다. 4월혁명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의 힘으로 집권자를 교체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한편 당시 유일한 정치적 대체세력이었던 민주당은 양원제와 내각책임제에 기초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여 제2공화국을 탄생시킨다.(대통령 윤보선/국무총리 장면) 그러나 보수/진보를 막론한 다양한 사회세력의 도전은 장면정부를 압박하였고, 이러한 복잡한 정세속에서 이승만 정권 말기때부터 정권 장악을 모의했던 군부세력은 민주당 정부의 무능과 국가안보 확보을 구실로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을 필두로 하여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후 1년 7개월간의 군정의 뒤를 이어 1962년 12월 17일 국민투표로 확정된 개정헌법에 의하여 1963년 10월 대통령선거와 11월 제6대 국회의원선거를 거쳐 12월 17일 대통령 박정희가 취임함으로써 제3공화국이 탄생하게 된다. 

한편 군부는 쿠데타 당시부터 반공과 함께 정책의 최우선적 목표를 경제성장에 두었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이 통치하던 1960~70년대에는 국가 주도의 성장정책이 시행되었다. 경제개발은 일단 외형적인 면에서 괄목할 만한 결과를 가져왔지만(수출 신장률 40% 증가, 경제성장률 8.9%등), 이러한 경제발전전략은 민족적/국가적으로 값비싼 대가(한일협정체결, 베트남전쟁 파견, 농촌경제 파탄, 노동력 착취, 계급간/지역간 불평등 심화 등등)를 담보로 한 것이었다.

박정희와 정부여당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대통령의 3선연임을 허용하는 이른바 '3선 개헌'을 변칙적으로 통과시키고, 1971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를 가까스로 이겨 연임에 성공하게된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 과정에서 표출된 국민들의 현 정권에 대한 불신을 확인하고는 더이상 집권이 어렵다고 느끼게 된다. 마침 때는 냉전이 완화되고 당시 미국대통령 닉슨이 중국을 방문하는 등 본격적인 화해조치가 이루어지던 시기였고, 박정희는 이러한 세계적 분위기를 이용하여 7.4 남북공동성명을 추진하는데, 이는 철저히 유신에 대한 정당성 확보를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즉, 박정희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집권이 불가능하자 남북공동성명을 통해 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기대치를 높인 뒤 한국적 민주주의를 고안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지 3개월 후인 1972년 10월 17일에  유신체제를 선포한 것이다. 유신헌법에서는 대통령의 연임 제한 조항이 철폐되고,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어용기구에 의해 간접선거제로 선출하도록 하였다. 또한 집권여당이 쉽게 과반수 의석을 확보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언론/출판/집회 자유 통제 및 긴급조치권이라는 악법을 통해 국민들의 저항권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 하였다. 이로써 제4공화국, 아니, '겨울공화국'이 탄생하였다.

한편 1978년 총선에서 제1야당인 신민당이 집권여당인 공화당보다도 더 많은 득표율을 올린데 이어,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이 유신체제에 대한 전면투쟁을 선언하였다. 그러자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김영삼이 총재로 선출될 당시 신민당 전당대회에 불공정행위가 있었다고 발표하였고, 김영삼 총재에 반대했던 신민당 세력은 김영삼을 총재직에서 박탈하기로 결정한다. 김영삼은 이러한 과정에서 분명 정부가 개입되었다고 판단하고 <뉴욕타임즈>에 미국정부가 독재정권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한국 국민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요구하였다. 공화당은 김영삼이 국가를 모독했다는 논리로 김영삼의 의원직까지 박탈하게 된다. 당시 유신체제를 반대하던 국민들의 대표격이었던 김영삼이 그렇게되자, 국민들은 공분하여 10월 16일부터 부산/마산/창원을 시작으로(부마항쟁) 대규모 시위를 벌이게 된다. 상황이 좋지않게 흘러감을 인지한 박정희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강경대응에 나서지만, 온건론을 주장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10월 26일 밤 살해되고 만다.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다음 날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다. 최규하는 유신헌법에 의거하여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정식으로 10대 대통령에 선출되고, 계엄사령관으로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임명된다. 한편 군부는 박정희 피살사태에 대한 정국 운영방식을 둘러싸고 정승화 세력과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으로 갈라지게 된다. 전자는 민간으로의 권력 이양과 민주정부의 수립을 목표로 하였고, 후자는 여전히 유신체제의 지속과 군부의 기득권 유지를 모색하고 있었다. 신군부세력은 박정희시절부터 군 내의 요직을 장악하면서 군 내의 실세로 자리매김한 집단이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특혜를 유지하기 위해 국민들의 염원을 져버리는 행동을 감행한다. 즉, 1979년 12월 12일 신군부세력은 정승화를 제거하고 군권을 장악한 것이다. 게다가 최규하 대통령은 1980년 4월 14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앙정보부장서리로 겸임발령함으로써 전두환을 실질적인 최고권력자로 만들고 만다. 정치권은 이에 대응하여 3김씨(김종필,김대중,김영삼)를 중심으로 다가올 대통령 선거에 대비함과 동시에 신군부세력의 정치적 음모에 대한 경계에 들어갔다. 3김씨는 치열한 경쟁속에서도 직선제 개헌과 계엄령 해제, 민간정부로의 권력 이양이라는 기본 방향에서 이해관계를 같이 하였다. 그러나 신군부는 군권장악 후 이미 민주화세력들의 저항에 대비하여 물리적 진압작전을 준비하고 있었고, 3김씨를 포함한 정치세력과 학생, 재야세력들은 이러한 신군부의 물리적 힘을 간과하고 있었다. 해방 직후의 불행한 역사가 다시 재현되려하고 있던 것이다.

 

2. 5.18 항쟁의 전개과정 

5.18 전야의 신군부 쿠데타는 국무위원들을 총검으로 위협해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를 관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대학생, 정치인, 재야인사 등 총 2천 7백여 명을 한밤중에 전격 체포하고, 계엄포고령을 통해 집회금지, 정치활동 금지, 파업 금지, 언론 사전검열, 대학 휴교령 등 민주주의 제도 자체를 정지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광주에서도 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민주인사와 학생들이 대거 체포되고, 조선대 캠퍼스는 공수부대에 의해 점령을 당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전 9시경, 자신들의 일상을 위해 학교에 들어가겠다는 전남대 학생들과 휴교령에 따라 교내 출입을 허용할 수 없다는 군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조성되었다.

(작성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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