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13. 3. 22. 17:10
원제 Surely You're joking, Mr. Feynman
페이지 230|ISBN 9788983710444|판형 A5, 148*210mm|

이번주에 읽었던 책은 지금 소개할 이 책과 도스또예프스키의 <죄와 벌> 이었는데, <죄와 벌>은 그럭저럭 읽는데엔 성공했지만 다시 한 번 읽어봐야 작가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작품을 썼는지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아서 리뷰는 다음으로 보류하였고, 상대적으로 가볍게 읽혔던 이 리처드 파인만의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부터 살펴볼까 한다.

이 책은 그가 어린시절 때부터 물리학자로서 명성을 떨치기까지 있었던 재미있고 스릴있던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파인만 자신이 직접 옛 기억을 상기시키며 쓴 책이라고 한다. 책의 대략적인 스토리는 위키백과의 파인만에 대한 소개글에 잘 나와있다.

 

파인만은 1918년 5월 뉴욕 시 퀸즈의 파 락어웨이(Far Rockaway)에서 태어났다. 파인만의 부모는 유대인이었으나, 유대교의 의식을 따르지는 않았다. 어린 파인만은 옳은 답변보다는 질문을 통해 생각하게 하는 그의 아버지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그가 평생동안 간직하게 되는 천성인 유머와 재치를 불어넣어 주었다. 어린 시절 그는 라디오 수리에 많은 관심을 뒀으며 기계를 다루는 데에 재능이 있었다. 또한,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스스로 고안해 낸 수학기호들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의 직설적인 화법은 때때로 보수적인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였는데, 고양이의 신경계에 대한 발표를 준비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고양이의 지도가 있으십니까?”라고 물었다.

1939년 MIT를 졸업하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을 때 그의 나이는 24세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미국의 원자폭탄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일하였으며 이후 코넬 대학교 이론물리학 조교수로 재직하였고 1950년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Caltech)의 교수가 되어 계속 재직하였다.

1965년 J.S.슈윙거, 도모나가 신이치로와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공동수상하였다.

이 소개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그는 생애동안 세 번의 결혼을 했다.(좀 능력자인듯...) 첫 아내는 결핵으로 죽었다. 소개에 나와있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결과로 얻어진 원자폭탄이 그 유명한 히로시마 원자폭탄이었다. 한편 그는 1988년 2월 15일에 사망했다. 어쩌면 그는 대공황과 전쟁이 겹친 시기에 살았기에, 근현대물리학이 급속히 발전하는 시기에 물리학을 접하는 행운을 얻었을지도 모르겠다. 시기를 타고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인 것 같다.

에피소드 각각이 저자의 실제 경험(정말 시시콜콜한 일상에 대하여도 적혀있다)이 순전히 저자의 관점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나름 재미있게 읽을 수 있고, 이 저명한 물리학자가 쓴 책이 너무나 무거운 내용으로 이루어져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는 전혀 필요가 없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이 책은 저자가 얻은 지식이나 사상을 담으려고 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이 책을 읽고나서 '그래, 이런 위대한 학자는 이렇게 재미있으면서도 사회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의미있는 삶을 살았구나.' 하고 끝내기엔 너무 아쉬웠던 탓에(사실 책 내용 자체가 많이 얻어갈 것도 없고, 정말 순전히 자신이 뭘 하고 살아왔는지 적어둔 일기장같은 느낌이다..) 몇몇 부분을 발췌하여 그의 학자로서의 본받을만한 면모를 살펴볼까 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이것저것 시도해보는 것을 전혀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열두살 때 집에 실험실을 꾸며 축전지, 충전기와 전구 등을 연결하여 직렬과 병렬의 원리를 스스로 깨닫기도 하고, 가족들을 놀래켜주려고 간단한 원리로 도난 경보기를 만들기도 했다. 그의 장난스런 기질은 확실히 학문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편협을 피하고, 창의력을 발휘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을 것 같다. 그는 라디오 듣는 것을 즐겼는데, 그 당시엔 대공황이었기 때문에 고장난 라디오를 사서 고쳐 듣곤 했다. 라디오를 고치는데에 다소 솜씨가 생긴 그는 주변 이웃들의 라디오를 고쳐주면서 자연스레 '귀납적 탐구방법'을 익혔고, 자신이 누군가에게 쓸모있는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기쁨을 느꼈다. 위대한 학자들은 어린시절부터 대체로 이렇게 '될 성 싶은 길'을 걷는 행운을 누리는 듯 보인다.

그의 프린스턴 대학원생 시절, 어떤 심리학 교수가 세미나에 와서 최면을 하는 과정을 선보이게 될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그 최면 시범에 참가하게 되었다.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성냥에 불을 붙입니다. 불어서 성냥불을 끄자마자 당신 손등에 갖다댑니다. 당신은 전혀 뜨겁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생각했고, 그는 단지 손등이 따뜻하다고만 느꼈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나는 눈을 뜰 수 있어. 하지만 이 상황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어디까지 가는지 한번 두고 보자구" 그러나 눈을 떠보니 손등에는 덴 자국과 함께 물집이 잡혀있었다. 그는 여기에서 얻은 교훈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자신에게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어, 단지 하고 싶지 않을 뿐이야' 라고 할 때 이것은 실제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다르게 표현하는 것일 수 있다." 우리가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둘러보기만 해도 우리가 얼마나 무능력한 존재인지 금방 깨닫고 만다!

그는 자신이 좋아했던 물리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철학에도 관심이 생겨 철학과의 세미나에도 참여하고 토론하기도 했고, 생물학에 관심이 생겨 생물학도들과 논문을 준비하기 위한 실험(물론 책에 의하면 결국 자신에 의해서 실험을 망쳤다고 써있지만)을 하기도 한다. 한 마디로 그는 서슴없이 돌진하는 스타일이었다. 한 번은 그가 그 유명한 닐스 보어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보어를 이렇게 표현했다. "그들(닐스 보어 및 그의 아들)은 덴마크 출신으로 말할 것도 없이 아주 유명한 물리학자들이었다. 거물들에게도 보어는 위대한 신이었다!" 그는 보어가 주최한 세미나에 참가했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는 군중들의 머리 사이로 그의 얼굴을 겨우 보았을 뿐이었다. 다음 날 보어는 아들을 통해 그와 만나고 싶다고 말하였고, 위대한 물리학자 보어와 (그 당시엔)별볼일 없었던 파인만은 아침 여덟 시에 만나 '효율적인 폭탄을 만드는 방법'에 대하여 논의한다. 그 둘은 사회적 지위라는 측면에서 다소 차이가 났지만, 논쟁은 두 시간 동안 계속되었고, 논쟁이 끝난 이후에 보어의 아들은 그에게 보어가 이렇게 말했다고 전달한다. "저 뒤에 있는 작은 친구의 이름을 기억해 둬. 그는 유일하게 나를 두려워하지 않아. 그러니 내 아이디어가 잘못 되었으면 바른 말을 할 거야. 다음에 아이디어에 대해 토론할 일이 있으면, <예, 맞습니다. 보어 박사님>이라고밖에 말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필요 없어. 먼저 저 친구를 불러서 얘기하는 게 제일 좋아" 파인만은 자신의 가장 큰 장점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늘 이런 식으로 멍청했다. 나는 내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잊어버린다. 나는 항상 물리에 관해서만 걱정한다. 아이디어가 이상하다고 생각되면, 나는 이상하다고 말한다. 아이디어가 좋으면, 나는 좋다고 말한다. 간단한 일이다. 나는 늘 이렇게 살아왔다. 당신이 할 수 있다면 이것은 썩 괜찮고 기분좋은 일이다. 나는 이렇게 할 수 있는 행운을 내 삶에서 누렸다."  이 얼마나 부러운 성질이 아닐 수 있겠는가!

또 한 편의 에피소드는 우리 많은 대학생들에게 일침을 준다.

"MIT시절에 나는 사람들을 놀리기를 좋아했다. 한 번은 기계 제도 시간이었는데, 어떤 실없는 친구가 운형자(곡선을 그릴 때 쓰는 플라스틱 자)를 들고 말했다. "이 곡선에 어떤 공식이 있을까?" 나는 잠시 생각한 뒤에 말했다. "있지, 이 곡선은 아주 특수한 곡선이야. 내가 보여주지" 그러고 나서 내 운형자를 들고 천천히 돌리면서 계속 말했다. "운형자의 곡선은 어떤 방향으로 돌려도 가장 아랫부분의 접선이 수평이 되게 만들어져 있어" 교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운형자를 들고 이리저리 돌리면서 한 손에는 연필을 들고 가장 낮은 점에 수평으로 대어 봐서 접선이 수평임을 확인했다. 미적분 시간에 모든 곡선이 최소점에서의 도함수가 0이라는 것을 <배워>놓고도 모두들 이 <발견>에 흥분했다. 그들은 자기가 무엇을 <아는지> 모르는 것이다."

이 글을 읽고 그럼 나는 과연 얼만큼 배운 것을 <이해>하고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요즘 세상에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정확히 어떤 체계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기계적으로, 반강제적으로 하는 과제나 시험이 지식을 스캔하는데 있어서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나 그것들을 직조하는데에는 전혀 도움이 안될 수도 있다. 요즘은 알바도 접고 읽고 싶은 책들을 읽고 하고싶은 공부도 하며(학점을 적게 듣기 때문에..) 즐겁게 사는 편이지만 요즘은 이런 측면이 욕심이 든다. 학부시절동안 접했던 지식들을 나만의 방법과 생각으로 재구성하는 프로젝트.. MIT open course의 math강의 중 topology라는 과목의 syllabus를 보면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학부생으로서 한 학기 강의를 듣고나서 얻어야 하는 것은 그 강의의 내용을 정리한 노트나 학점이 아니라 그 과목에 대한 <연구노트>이다." 그것을 2년 전에 보았지만 여전히 실천할 엄두를 못내고 있는 머저리가 여기 있다. 이런 책은 너무 자주 보면 과학 및 과학자에 대한 신비주의가 생겨서 좋을리가 없지만, 가끔 보는 건 이렇듯 좋은 자극을 주기 때문에 한달에 한 번 씩은 보는 것 같다. 비슷한 계열이지만 약간 무거운 내용으로는 히로나카 헤이스케의 <학문의 즐거움>이 있다. 다른 분야의 저명한 분이 남긴 자서전이나 에세이 중 추천해주실 것이 있으면 리플로 남겨주셨으면 한다. 끝.

Posted by Platonism
카테고리 없음2013. 3. 15. 22:51

사랑의 기술

사랑의 기술
원제 (The)art of loving
페이지 213|ISBN  9788931001143|판형 A5, 148*210mm

 

이 책은 내가 5월에 참여해야 할 독서경시대회의 지정도서였고, 제목을 보면서 '뻔한스토리의 연애지침서겠거니..' 하면서 내용에 대한 일말의 기대 없이 반강제로 펴게된 책이었다. 그러나 책의 머리말을 보면서 나는 이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되었는데, 첫 문단이 다음과 같았기 때문이다.

"사랑의 기술에 대한 편리한 지침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실망할 것이다. 사랑은 스스로 도달한 성숙도와는 관계없이 누구나 쉽게 탐닉할 수 있는 감상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려는 것이 이 책의 의도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사랑도 일종의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사랑은 건축, 공학, 의학의 기술과 같이 연습과 훈련이 필요한 기술이라는 것이다. 그는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사랑에 관한 올바른 이론을 배우고 그에 맞게 사랑을 실천해야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사랑에 대하여 정신분석학적 및 철학적 해석을 시도하는데,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그는 결국 '사랑이란 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라는 필수적인 질문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답하거나 정의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 책이 이런 무거운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잘 읽혔던 이유는 몇몇 부분에서 참된 공감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공감이 갔던 여러 부분을 어느정도 일관성 있게 이어붙이는 것이 이번 리뷰의 목표이다. 내가 주로 인용할 내용은 책의 앞 1/3정도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이 부분만 읽어도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고 싶은 핵심내용은 다 나온 것이나 다름없다고 본다. 일요일에 하는 그.. 영화 소개 프로그램을 보듯이 이 책을 재미있는 부분을 위주로 소개하는 시간이라 생각하며 가볍게 읽어주시기 바란다.

먼저, 저자는 첫 챕터에서 현대인들이 사랑에 대해서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분석하면서 사랑을 기술로서 배워야한다는 생각을 정당화시키려한다.

"...사랑에 대해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받는'문제로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어떻게하면 사랑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사랑스러워지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들이 이 목적을 추구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남자들이 특히 애용하는 방법은 성공해서 자신의 지위의 사회적 한계가 허용하는 한, 권력을 장악하고 돈을 모으는 것이다. 특히 여성이 애용하는 또 한가지의 방법은 몸을 가꾸고 옷치장을 하는 등 매력을 갖추는 것이다."

"사랑에 대해서는 배울 필요가 없다는 태도의 배경이 되는 두 번째 전제는 사랑의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는 가정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고 사랑할 -또는 사랑받을- 올바른 대상의 발견이 어려울 뿐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 우리들 모두와 마찬가지로 남남으로 지내오던 두 사람이 갑자기 그들 사이의 벽을 허물어 버리고 밀접하게 느끼고 일체라고 느낄 때, 이러한 합일의 순간은 생애애 있어서 가장 유쾌하고 가장 격앙된 경험의 하나이다. 특히 폐쇄적이고 동떨어져 있어서 사랑을 모르고 지내던 사람의 경우라면 특히 놀랍고 기적적인 경험이다. 갑자기 친밀해지는, 이 기적은 성적 매력과 성적 결합에 의해 시작되는 경우 대체로 더욱 촉진된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오래 지속될 수 없다. 두 사람이 친숙해질수록 친밀감과 기적적인 면은 더욱 줄어들어서, 마침내 적대감, 실망감, 상호간의 권태가 생기며 최초의 흥분의 잔재마저도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들은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한다. 사살상 그들은 강렬한 열중, 곧 서로 '미쳐 버리는' 것을 사랑의 열도의 증거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기껏해야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입증할 뿐이다."

"... 사랑처럼 엄청난 희망과 기대 속에서 시작되었다가 반드시 실패로 끝나고 마는 활동이나 사업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는 적절한 방법은 오직 하나 뿐인 것 같다. 곧 실패의 원인을 가려내고 사랑의 의미를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챕터2에서는 사랑의 이론에 대해서 다루는데, 가장 핵심포인트는 저자는 사랑을 '인간 실존문제에 대한 해답'으로서 제시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개인으로서든, 인류로서든 결정되어 있는, 본능처럼 결정되어 있는 상황으로부터 비결정적이고 불확실하며 개방적인 상황으로 쫓겨난다. 확실한 것은 과거뿐이고 미래에 대해서 확실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음 뿐이다. ... 분리되어 있는 실재로서의 자기 자신의 인식, 자신의 생명이 덧없이 짧으며 원하지 않았는데도 태어났고 원하지 않아도 죽게되며,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들보다 먼저, 또는 그들이 자신보다 먼저 죽게 되리라는 사실의 인식, 자신의 고독과 자신의 분리와 자연 및 사회의 힘 앞에서의 자신의 무력함의 인식 - 이러한 모든 인식은 인간의 분리되어 흩어져 있는 실존을 견딜 수 없는 감옥으로 만든다. 인간은 이 감옥으로부터 풀려나서 밖으로 나가 어떤 형태로든 다른 사람들과, 또한 외부세계와 결합하지 않는 한 미쳐 버릴 것이다. ...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이러한 분리상태를 극복해서 고독이라는 감옥을 떠나려는 욕구이다."

저자는 이러한 분리상태를 극복하는 방식으로서 도취적 합일(특히, 성욕의 만족), 집단과의 일치를 통한 합일, 창조적 활동,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융합의 달성인 '사랑' 이 있다고 말하며 이 중 다른 것들은 여러가지 한계점에 의해 인간의 분리상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며, 완전한 해답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 있어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다는 역설이 성립된다."

그리고 사랑의 본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 이며 '빠지는 것'은 아니다.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사랑은 원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사랑의 능동적 성격을 설명할 수 있다. ... 가장 광범하게 퍼져 있는 오해는 준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것, 빼앗기고 희생하는 것이라는 오해이다. 그 성격이 받아들이고 착취하고 혹은 저장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단계를 넘어서지 못한 사람은 '준다'고 하는 행위를 이러한 방식으로 경험한다."

"사랑의 능동적 성격은, 준다고 하는 요소 이외에도, 언제나 모든 사랑의 형태에 공통된 어떤 기본적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해진다. 이러한 요소들은 보호, 책임, 존경, 지식 등이다."

이 후의 챕터에서는 사랑의 대상에 따른 분류: 형제애, 모성애, 성애, 자기애, 신에 대한 사랑 등에 대하여 정신적, 사회적 현상을 통해 분석하며, 현대 서양사회에서 사랑이 저자의 기준에 비추어서 어떤 식으로 변모하고 붕괴되었는지 살펴본다. 마지막 챕터에서는 이 사랑을 과연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하는 내용이었는데, 다른 이야기는 대체로 시덥잖은 내용이라 생각되었고 한 가지 깊은 공감이 갔던 부분을 또한 인용하면서 마무리하려고한다. 요점은 '현재를 현재로서 살아가는 삶을 추구하라' 는 것이다.

"정신집중은 우리 문화에 있어서는 실행하기에 더욱 어려운 일이다. 우리 문화에서는 모든 일이 정신집중의 능력과 어긋나는 작용을 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정신집중을 배우는 가장 중요한 단계는 독서를 하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지 않고 홀로 있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 곧 음악감상, 독서, 어떤 사람과의 대화, 경치구경 등에 전념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바로 이 순간에 하고 있는 활동이 유일하게 중요한 일이 되어야 하고 이 일에 몰두해야 한다. 만약 정신집중이 되었다면... 새로운 차원의 현실성을 갖게된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정신을 집중시킨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은 경청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체하고 심지어 충고조차도 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들 자신의 대답조차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결과 대화는 그들을 피곤하게 만든다. 그들은 만일 정신을 집중시키고 듣는다면 더욱 피곤해질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이다. 어떤 활동이든, 만일 정신을 집중시킨 상태에서 행한다면, 우리를 더욱 각성시키지만(비록 후에는 자연스럽고 유익한 피로감이 생기지만) 정신이 집중되지 않은 모든 활동은 우리를 졸립게 만든다. ... 정신을 집중시킨다는 것은 전적으로 현재에, 여기에 지금 살고 있다는 것, 따라서  지금 무엇인가 하고 있으면서 다음에 해야 할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말할 것도 없이 정신집중은 서로 사랑하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 의해 실행되어야 한다."

당신은 현재 사랑에 '빠져'있는가, 아니면 사랑을 '하고'있는가? 그 사랑은 당신이 고독과 분리상태를 벗어나 '합일'을 느끼게 하고 궁극적인 만족감을 주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이에 대한 구체적이고 명확한 답변을 원한다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란다. 

나는 이 책이 충분히 소장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조만간 서점에 가서 이 책을 구입할 생각이다. 한편 리뷰라는 것이 책을 여러 번 읽어보고 정리한 후에 '내 생각'을 기록해야 되는 것인데, 심리학 분야에 대해 문외한인 나는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잡다한 공상들을 명확한 나만의 의견으로 수렴시키는데 실패하여(순전히 필자의 게으름때문일 수도...) 결국 인용문 위주의 리뷰같지 않은 리뷰를 적게 되었다. 이 점에 대해 죄송한 마음을 표하고 싶고, 다시 이 책을 꼼꼼히 읽고 정리할 시간이 허락될 때, 이 리뷰도 좀 더 구체적인 주제와 의미를 가지는 내용으로 수정될 것이다.

Posted by Platonism
카테고리 없음2013. 3. 8. 16:25

나는 이 책의 스타일이 별로 맘에 들지 않는다. 이 책은 독자에게 너무나도 많은 질문을 일관성 없이 던지는 반면 특정한 철학 이론을 깊이 파고들지도 않기 때문에 내용이 다소 중구난방식이었고, 그 때문에 글 내용을 머릿속에서 정리하는 일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책을 다 읽고나니 한 학기분량의 교양철학 강의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사실 이것이 저자가 독자들에게 바란 바람직한 후기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 '죽음의 사례를 통하여 알아보는 고전철학' 이라는 새 제목을 붙여주었다.

어찌되었건 저번 리뷰에서 언급했던 파트2의 내용에 대해서 논의할만한 내용을 간추려보려고 한다.

파트2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저자의 질문은 이것이다.

"죽음은 나쁜 것인가?"

저자가 이런 질문을 한 의도가 죽음이 반드시 "나쁜 것"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책을 읽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저자는 '박탈이론'을 지지하는 사람으로서, 죽음이 나쁜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나 '죽음 그 자체'가 될 수 없고, 오로지 "죽음이 삶을 박탈해 간다는 사실"에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고통스럽기만 한" 과정은 아니며, 물리주의 관점에서 볼 때 죽음이후의 나 자신은 "비존재"이므로 죽음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나'에게 좋거나 나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죽음이 삶을 박탈한다는 사실이 죽음을 진짜로 "나쁘게"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그러한 사실 때문에 죽음이 나쁜 것이라면 영생을 얻는 것은 반드시 좋은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고 할 때, 과연 우리는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야 의미있고 행복한 삶을 꾸려나갈 수 있을까? 저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원히 하고 싶어 할 만한 그런 일을 상상하는 것조차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 "죽음이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근거는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을 빼앗아간다는 사실'에 있다." 영생은 과연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일까?

이어서 저자는 삶의 가치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질문한다. 그는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가치는 크게 '도구적'가치와 '본질적'가치로 나누어볼 수 있다고 말한다. 예를들어 직업, 돈, 질병과 같은 것들은 기쁨이나 고통을 얻게 되는 수단으로서의 도구적 가치이며 쾌락, 고통 등은 그 자체로서 좋고 나쁨을 판단할 수 있는 본질적 가치이다. 저자는 이 중에서 '본질적'가치가 행복을 위해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쾌락주의, 그릇이론 등 삶의 가치를 이러한 본질적 가치들의 총합으로 '정량화'하는 이론들을 소개하고 그것들의 장점과 한계를 제시한다.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경험 기계"에 대한 것이었는데, 요약하자면 이렇다. "뇌의 다양한 부분을 자극하여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경험들을 실제와 똑같이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계가 있다면,  그 기계는 실제 당신의 삶보다 더 가치있는 삶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변은 다양할 수 있지만 결국 나 자신의 존재의미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그 답이 달라질 것이라고 본다. 또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지금 내 인생이 그러한 경험기계에 의해서 실행되는 프로그램일 뿐이고 진정한 '나'는 다른 곳에 있다고 해도, 그것을 내가 현재 인지하지 못한다면, 나의 존재의미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이다. 심심풀이 땅콩과도 같은 상상들이지만 과학기술이 충분히 발전한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이런 질문들은 철학자들에게 '인간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이론을 정립하는데 있어서 완전히 새로운 접근방식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더 자세한 논의는 수잔 그린필드의 <미래(Tomorrow's people)> 라는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그 이후의 장에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이성적으로 적절한(합리적인) 태도인가?" , "자신의 판단을 토대로 자살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합리적인가? 그것은 도덕적으로 허용가능한가?" 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을 제시한다. 특히 '다른 사람의 이득을 위한 자살'에 관한 논의에서는 "공리주의"와 "의무론"의 대립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이 질문에 대하여 공리주의는 강경한yes이고 의무론의 입장에서는 강경한no가 될 수 밖에 없다. 저자는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상식적인 선에서도 적절한 합의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이의 "동의"가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동의는 무지의 상태에서 감정적인 ok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와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충분히 이해한 상태에서의 동의"를 뜻한다. 저자는 이러한 동의의 절차가 거쳐지고 나서야 그러한 자살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선택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저자의 의견에 나도 동의하며, 가치판단이 모호한 선택지들에 대해서는 행위의 합리성보다도 행위에 대한 사회정서 및 도덕성이 선택의 기로에서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밖에 없음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책을 거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철학적 논의라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대강 알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 할 수 있겠다.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시절과 비교하여 철학에서 다루는 주제는 훨씬 다양하고 그 깊이도 훨씬 심오해졌으나, 그 방식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고 생각한다.(물론 기호논리학이 등장하면서 근대 철학은 수학의 한 분야로 생각될 정도로 수학의 영향을 크게 받긴 하지만.) 개념(Concept)에 대한 정의역(Domain)이 정해져있고, 그로부터 도출되는 정의(Definition)의 명확함을 바탕으로 특정 명제에 대한 논리적 타당성(Validity)을 판단하는 과정인, 대체로 구문론(Syntax)에 가까운 '수학적 논의'와 달리 개념의 정의역이 실제 세계를 넘어서있는 철학적 논의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질문과 답변의 끊임없는 연결고리 안에서 나타나는 '모호한' 개념들을 보완하거나 변경하는 과정이기에(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생각이다.) 의미론(Semantics)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수학을 공부하는 나로서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자주 답답함을 느꼈다.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서 정의역이 형(Form)을 초월한다는 것을 상상한다는 것은 저자의 입장에서 "나 자신이 죽은 상태"를 상상하는 것 만큼이나 수월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제와서 이 책을 추천한다고 하면 그 이유는 아마도 이 책이 여러분에게 내가 했던 생각들만큼이나 자질구레한 생각들을 한 번 쯤은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상 두루뭉술한 잡소리였고, 비판은 기꺼이 환영한다.

Posted by Platonism
카테고리 없음2013. 3. 1. 23:53

 

 

죽음이란 무엇인가(원제 : DEATH)

 

셀리 케이건 저 / 박세연 역 / 엘도라도

 

520p / ISBN 9788901152219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언젠가 끝난다는 것을 알고있다. 그리고 그 인생이 끝나는 시점을 우리는 '죽음'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죽음이란 무엇인가? 심장이 멈추고 뇌에 산소가 공급되지 않게 되어 신체의 모든 세포가 결국 생물학적으로 제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을 죽음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기독교와 같은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죽음은 단지 육체의 기능이 멈추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사후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러한 제2의 인생은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 뿐 아니라 죽음이라는 개념에는 다양한 심리학적/ 사회학적 질문들이 얽히고 섥혀있다.

이 책은 죽음을 단순히 하나의 문장으로서 정의하기 위해서 쓰인 책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이라는 개념을 철학적 관점으로서 '이해'하기 위해서 쓰인 철학 입문서이다. 한편 저자는 일원론 중에서도 물리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으로서, 이원론자들이 주장하는 바가 타당하지 않음을 철학적 사유를 통하여 말하려고 한다.물론 저자의 말하고 있는 내용 중에 수긍이 가지 않는 부분들(특히 일상적 경험을 바탕으로 독자를 설득하려는 대목들)이 몇 가지 있지만, 그것들이 내용전개에 있어서 모순을 가져다 주지는 않는 것 같다. 이 책은 크게 두 파트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부분(제1장~제6장)에서는 '인간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간의 정체성은 어떻게 보장받을 수 있는가?'에 대하여 논의를 펼치고 있고, 두 번째 부분(제7장~제14장)에서는 앞서 펼친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바탕으로 '죽음의 본질'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참고로 이렇게 두 파트로 나눈 것은 내가 임의로 행한 것임을 밝혀둔다. 그에 따라, 이 책에 대한 리뷰는 2번에 걸쳐 진행할까 한다.

첫 번째 부분에서 논의하고 있는 주요한 철학적 물음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1. 인간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 이원론(dualism)과 일원론(monism)

2.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진다는 사실이 영혼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Inference to the best explanation)' 이 될 수 있는가?

3. 데카르트 '육체와 정신은 서로 다른 것인가?' : 직관적 사고와 논리적 추론 사이의 차이

4. 플라톤의 이데아 : 영혼은 불멸의 존재인가?

용어들이 매우 생소할 수 있는데, 실제로 이 책을 읽어보면 의외로 쉽게 읽힐 것이다. 왜냐하면 저자는 많은 사례와 논리적 논증을 통해 각각의 철학적 개념들을 최대한 쉽게 풀어내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간이 허락한다면 꼭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고싶다. 철학을 전공하는 분들이 이 책에 대하여 어떤 의견을 가지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지만, 철학적 사유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잘 모르는 사람이나, 죽음이라는 개념을 어떠한 종교적 색깔 없이 최대한 이성적으로 설명하려는 책을 찾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추천한다.

나는 위의 4가지 철학적 물음들에 대하여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주장을 답습할 생각은 없다. 적어도, 저자에 의하면 일원론자도 이원론자도, 각자가 설명하기 힘든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에 두 이론 중 어느 하나가 인간의 존재를 더 잘 설명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한다. 어떤 측면을 택할지는 자신의 선택에 따른다는 의미이다. 어떤 이론이 더 적합한 이론인지 판가름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현재 이 글을 쓰고있는 시간이 마감 한 시간 전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위의 네 가지 질문에 대하여 모두 내 생각을 정리하기엔 빠듯할 것 같기 때문에 내 멋대로 3번째 질문에 대하여 먼저 내 의견을 써보고, 시간이 허락한다면 나머지 질문들에 대해서도 정리를 해보려고 한다. 허나, 3번의 질문에서 내가 중점을 두려고 하는 것은 데카르트의 질문 그 자체가 아니라, '직관의 헛점을 논리가 대신해 줄 수 있는가?' 에 대한 논의이다.

저자는 책에서 이러한 질문을 한다. "모서리가 둥근 사각형을 상상할 수 있는가?"

여러분은 이러한 사각형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모서리가 둥글면 과연 사각형 처럼 '각'을 가질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지구본과 같은 구의 평면 위에 여러분이 평소에 생각하고 있는 사각형을 그려보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여러분은 그것을 사각형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렸겠지만, 무슨 방법으로 그리던 간에 모서리가 둥근, '사각형이면서 사각형이 아닌' 어떤 도형이 그려질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평소에 말하고 상상하는 '진짜' 사각형인가? 

데카르트는 육체와 정신은 서로 다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깔려있다. '상상 가능한 것은 논리적으로도 가능하다'. 즉, 직관적으로 참인 것이 논리적으로도 증명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육체가 없어도 내 자신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영혼의 존재를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직관적으로 옳다고 믿는 것들이 정말로 항상 논리적으로 증명될 수 있을까?

수학에서의 예지만 방금의 질문에 대하여 굉장히 흥미로운 답변을 줄 수 있는 수학적 정리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Goedel's Incompleteness Theorem) : 산술체계를 포함하며 모순이 없는 모든 공리계에는 참이지만 증명될 수 없는 명제가 존재하며, 또한 그 공리계는 자신의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다.

이 정리는 위의 질문에 대하여 매우 회의적인 결론을 도출한다. 쉽게 풀어서 설명하자면, 수학에서는 "실제로 참인 명제이지만 논리적으로 증명(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명제가 존재한다" 는 의미이다. 이 정리는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였던 쿠르트 괴델(Kurt Goedel)이 1931년 증명한 정리로, 철학적 측면에서 보자면 '논리적 논증의 한계' 및 '직관이 논리에 비하여 열등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획기적이고도 충격적인 결과였다. 쉬운 예를 들어보자. 수학에서는 다음과 같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명제가 있다.

‘4 이상의 짝수는 두 개의 소수의 합으로 표시 된다.'

이 문제는 소위 '골드바흐의 추측'이라 불리는 명제로서, 아직 논리적으로 증명되지는 않았지만, 컴퓨터로 현재까지 계산한 값들에 대해서 한 번도 틀리게 계산된 적이 없기 때문에 많은 수학자들이 참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명제이다. 직관적으로 볼 때, 이 명제는 실제로도 참인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8 = 3 + 5 , 10 = 3 + 7, 12 = 5 + 7, ... 과 같은 식이다. 보통 이렇게 대입하였을 때 수많은 결과가 하나도 빠짐없이 맞는 것으로 도출된다면, 우리는 이 명제를 참이라고 믿고 이제 논리적으로 이 명제가 참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증명'을 통해서 밝히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증명을 통해 참임을 밝히지 않는다면, 언제 반례가 도출되어 이 명제가 틀린 것으로 판명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 의하면 이 명제는 증명 불가능한 명제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어처구니없게도, 실제로는 맞는 말을 하고 있는 명제인데, 왜 맞는지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가능한지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발표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근대 수학 사상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웠던 '연속체 가설' 이 이와 같이 참이지만 증명 불가능한 문제로 밝혀졌다는 사실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어떤 상황에서 충분히 '적용될 수 있는' 내용임을 말해주고 있다. 물론 이러한 논의가 인간의 삶에서 선택의 순간에 적용되거나, 철학적인 측면에서 하나의 이론이 될만큼 스펙트럼이 넓지는 않으나, 논리의 상아탑이라 불리는 수학에서 논리와 형식화에 대한 한계가 밝혀졌다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직관과 논리에 대해 가지는 고정관념을 깨버릴 수 있을만큼 충분히 가치있는 내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책의 저자는 데카르트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하여 위와 같은 수학적 정리를 이용하지 않고, 훨씬 간단하지만 철학적 사유를 포함하는 논리적 수순을 밟아나간다. 위의 내용은 데카르트의 주장에 대해 내가 리뷰한 것일 뿐이다.

한편, 이 책을 읽으면서 자잘하게 배우는 내용들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저자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단 한가지이다. '무엇이든 스스로 끊임없이 사유하고, 생각이 구체화되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근거를 제시하라.' 내 생각엔 이것이 철학적 사유라 불리는 과정의 시작인듯 보인다.

- 2편은 다음기회에-

 

 

 

Posted by Platonism
카테고리 없음2012. 11. 19. 00:53
감정이 주체되지 않는날엔 방정리를 하자. 신기하게도 어느정도 감정을 추스르는 것이 가능하다.
Posted by Platonism
카테고리 없음2012. 11. 18. 17:47
그럼 떠나든지,
자존심을 버려라.
그것도 싫으면 만남의 기회조차도 피해라. 상처없이, 아무 고민도 없이 얻을 수 있는 인연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바보같아보여도 인정하기싫어도 그 모습이 너 자신이다. 혼잣말로 위로하고 자위하는 역겨운 짓거리로 현실을 도피할순 없다. 부딪혀라. 울부짖고 분노해라. 갈망해라. 그리고 너의 사랑이나 너의 고독을 받아들여라.
Posted by Platonism
카테고리 없음2012. 11. 18. 02:31

대체로 사람마다 자신이 활동하는 공동체에서 맡고있는 역할을 그 공동체가 어디든간에 비슷한 것 같다. 사람마다의 이미지가 그 사람이 행동가능한 범위를 제한한다. 또한 자기 자신도 그것을 인지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정상적인 공동체에서 특정한 역할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신선한 무언가를 요구해봐야 의미가 없다. 요컨대 사람이 변하기 어려운 이유는 주변에서 그 의지를 차단시키기 때문이다. 허나 그 변화가 스스로의 인생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판단되는 경우 그야말로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데, 왜냐하면 그런 노력은 자신이 꾸며놓은 인간관계의 배치를 변경하는 것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그런 용기가 있고 실행력이 있다면, 그 사람의 역할은 또 다른 새로운 공동체에서는 다를 수 있고, 그 역할이 다시 이미지로서 피드백되므로, 그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삶을 사는 기분이 들 것이다.

나도 조만간 시도해볼까.

Posted by Platonism
카테고리 없음2012. 11. 17. 23:27

사람들은 흔히 재미있는 일을 하면 그 일에 몰두한다는 표현을 하고, 끝나고나면 '정말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하고 말하곤 한다. 한편 이것은 그 역도 성립한다. 어떤 시간의 구간에서 몰두하지 못하는 순간이 지속된다면, 그 때 인간은 지루함을 느낀다. 내가 평소에 살아가는 일상 또한 그러한 것 같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할 때나 몰두하는 것인데, 인생에서 모든 일이 몰두할만한 일이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항상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우리가 철학을 공부해야 하는 부분적인 이유가 될 것이다. 결국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일을 할 때 내가 그것에 몰두할 수 있도록 환경을 꾸미고 방법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내 인생 전반에 걸친 장기적 미션이라 할 수 있다.

당장 내일 일정을 생각해볼까? 나는 내일 오전에 교회에 있을 것이다. 신앙심이 부족한 나는 기도나 예배시간에 다른 곳에 마음을 둘 확률이 높다. 무엇을 하면 집중할 수 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기독교에서 소위 말하는 '믿는 마음' 을 가지고 기도를 해볼까한다. 예배시간의 이야기를 수첩에 적어보기도 할 것이다. 성경도 읽어보고, 내 생각에 대해 실시간으로 적어볼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간을 농밀하게 쓰고, 매 시간 몰두할 수 있는 인생을 살려고 노력할 것이다. 오해해선 안되는 것은, 이러한 것들이 억지로 해나가야만 하는 고단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을 찾는 과정자체는 대체로 즐겁기 때문이다. 예컨대, 항상 생각하고, 주체적으로 사는 삶은 몰두하는 삶의 한 가지 예라고 할 수 있다. 어찌되었건 인생은 좀 더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야 좋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Posted by Platonism
카테고리 없음2012. 11. 17. 01:25

오늘은 오랜만에 재미있는 시간을 가졌던 것 같다.

교회 리더누나와 동기형과 나 셋이서 식사도 하고 커피도 마시면서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한켠으로는 외로운 이들끼리 만나서 영혼이 담기지 않은 채로 대화를 하니 약간 공허한 느낌이 있긴 했지만, 꽉 채워진 대화가 언젠가 가능할 것이란 생각도 딱히 들지는 않는다.

철야예배는 기도가 너무 길다. 서있느라 힘들었다. 도중에 눈을 뜨고 주변을 바라보니 광신도들이 많았다.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나에게는 그렇게 인식되었으므로. 그들을 어떤 특정한 감정을 가지고 보진 않는다. 단지 그냥 그렇게 보인 것이다.

교회에서 집으로 오는 길은 대체로 험난한 편이다. 그 긴 시간동안 또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늘은 책보는데에 집중이 잘 된 편이다. 휴대폰이 꺼져있는 탓이었겠지. 망할놈의 인생은 종착역이 어디일지 궁금하다.

이미 오늘이 되어버린 토요일, 과제와 함께 기상하고 과제와 함께 잠드는 날.

우선은 오늘 보려고 계획했던 애니매이션부터 보면서 하루를 시작해볼까 한다. 센티멘탈리즘은 이제 좀 사라져줬으면 한다고.

Posted by Platonism
카테고리 없음2012. 11. 16. 00:42

제대하고 10달동안 뭘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뭔가 열심히 하려고는 했던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는 애쓰는 척만 하게되어서 조금 서글픈 감이 없지 않다.

한번 살펴보자. 소설쓰는것? 완전히 망했다. 독서모임도 깨지고, 그쪽계열에 유능한 사람이 널리고 널렸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그전에 그들과 비슷한 글솜씨와 독서량을 가져야 한다는 압박감이 소설을 재차 쓰는 것에 대해 엄두가 나지 않게 하는 것 같다.

음악이라.. 기타는 사놓고 한 때의 유행처럼 지나갔다. 노래실력이 늘은 것도 아니고, 오선지는 사서 썩혀두었다. 짬날때마다 이사한 집에서 피아노를 치자는 허무맹랑한 계획. 잊은지 오래다. 어쩌면 계획보다는 나의 열망이 그정도일 뿐일테지.

수학. 갈수록 꼬여간다. 솔직히 말하면 요즘은 뭘 배우고있는건지도 모르겠다. 어떤 분야를 공부할 때면 이것이 재미있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찾기 참 힘들다. 수학 공부를 하다보면 이런 경우가 있다. 재미있는 부분을 억지로 찾아야 될 때가.. 그전까진 어둠을 헤메듯이 그 어떠한 것도 명확하지 않다. 문맥이 읽히지 않고 Definition과 Theorem의 나열만이 머릿속에 존재한다. 그것들이 설사 논리적으로 잘 인지되었다고 해도 직관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첫째로는 익숙해지지 않았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그것에 그만큼의 흥미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직관은 다른 곳에서 찾지 않는다. 거시적관점을 가지게 되는 것은 그만큼 그 체계에 자신만의 해석이 곁들여졌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흥미를 가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통 두가지 경우로 나뉘는데, 첫째는 사실은 직관적 의미는 정말 흥미로운데 내용이 어려워서 이해를 못한 경우, 그리고 그것이 오랫동안 지속되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직관적 의미를 다 알고나서도 그 자체가 재미없고 시시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나는 아직 후자를 겪어보진 못했다. 학부수준의 수학이라고 해도 어떻게 감히 내가 그것들을 대체로 이해하고 평가를 마쳤다고 할 수 있겠는가? 웃기는 소리이다. 단지 서툴고, 비벼대야 하는 시기라서 그런 것이라 믿을 뿐이다. 다만 그 시간이 길어지면 힘에 부치지 않을까 하는 가벼운 걱정이다.

이렇듯 사실상 전역 후 한해가 허망하게 지나는듯하다. 그렇게 자신을 되새김질 하는 시간을 많이도 보냈으면서도 여전히 인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심한 꼴을 다시 한번 보았을 뿐이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내가 할 수 있는 건 헤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일과 미래의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뿐인것을.

지치지만 힘들다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반복되는 시간의 흐름에서 내 사상까지 중복되어간다면 자존심이 상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다시말하면, 변화의 시기가 온 것이다. 인생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이나믹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은 짧아진다.

기존의 세가지 목표분야에 한 가지를 더해본다.

올해 남은 기간과 내년은 영어다.

언어가 안되어서 유학이라도 나갔을 때 무시당하면 그것만큼 열받는 일도 없을테지. 이런 저런 영어달인들과 조만간 상담시간을 잡아봐야할듯 싶다.

블로그야 미안하다. 그동안 방치해둬서. 당분간은 그래도 자주 올듯싶구나. 이번 변화의 패턴 중에 하나에는 너도 들어가있거든. 우리 화이팅하자.

Posted by Platon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