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무엇인가? - 2. 죽음은 나쁜 것인가?
나는 이 책의 스타일이 별로 맘에 들지 않는다. 이 책은 독자에게 너무나도 많은 질문을 일관성 없이 던지는 반면 특정한 철학 이론을 깊이 파고들지도 않기 때문에 내용이 다소 중구난방식이었고, 그 때문에 글 내용을 머릿속에서 정리하는 일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책을 다 읽고나니 한 학기분량의 교양철학 강의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사실 이것이 저자가 독자들에게 바란 바람직한 후기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 '죽음의 사례를 통하여 알아보는 고전철학' 이라는 새 제목을 붙여주었다.
어찌되었건 저번 리뷰에서 언급했던 파트2의 내용에 대해서 논의할만한 내용을 간추려보려고 한다.
파트2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저자의 질문은 이것이다.
"죽음은 나쁜 것인가?"
저자가 이런 질문을 한 의도가 죽음이 반드시 "나쁜 것"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책을 읽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저자는 '박탈이론'을 지지하는 사람으로서, 죽음이 나쁜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나 '죽음 그 자체'가 될 수 없고, 오로지 "죽음이 삶을 박탈해 간다는 사실"에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고통스럽기만 한" 과정은 아니며, 물리주의 관점에서 볼 때 죽음이후의 나 자신은 "비존재"이므로 죽음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나'에게 좋거나 나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죽음이 삶을 박탈한다는 사실이 죽음을 진짜로 "나쁘게"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그러한 사실 때문에 죽음이 나쁜 것이라면 영생을 얻는 것은 반드시 좋은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고 할 때, 과연 우리는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야 의미있고 행복한 삶을 꾸려나갈 수 있을까? 저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원히 하고 싶어 할 만한 그런 일을 상상하는 것조차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 "죽음이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근거는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을 빼앗아간다는 사실'에 있다." 영생은 과연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일까?
이어서 저자는 삶의 가치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질문한다. 그는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가치는 크게 '도구적'가치와 '본질적'가치로 나누어볼 수 있다고 말한다. 예를들어 직업, 돈, 질병과 같은 것들은 기쁨이나 고통을 얻게 되는 수단으로서의 도구적 가치이며 쾌락, 고통 등은 그 자체로서 좋고 나쁨을 판단할 수 있는 본질적 가치이다. 저자는 이 중에서 '본질적'가치가 행복을 위해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쾌락주의, 그릇이론 등 삶의 가치를 이러한 본질적 가치들의 총합으로 '정량화'하는 이론들을 소개하고 그것들의 장점과 한계를 제시한다.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경험 기계"에 대한 것이었는데, 요약하자면 이렇다. "뇌의 다양한 부분을 자극하여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경험들을 실제와 똑같이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계가 있다면, 그 기계는 실제 당신의 삶보다 더 가치있는 삶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변은 다양할 수 있지만 결국 나 자신의 존재의미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그 답이 달라질 것이라고 본다. 또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지금 내 인생이 그러한 경험기계에 의해서 실행되는 프로그램일 뿐이고 진정한 '나'는 다른 곳에 있다고 해도, 그것을 내가 현재 인지하지 못한다면, 나의 존재의미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이다. 심심풀이 땅콩과도 같은 상상들이지만 과학기술이 충분히 발전한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이런 질문들은 철학자들에게 '인간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이론을 정립하는데 있어서 완전히 새로운 접근방식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더 자세한 논의는 수잔 그린필드의 <미래(Tomorrow's people)> 라는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그 이후의 장에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이성적으로 적절한(합리적인) 태도인가?" , "자신의 판단을 토대로 자살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합리적인가? 그것은 도덕적으로 허용가능한가?" 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을 제시한다. 특히 '다른 사람의 이득을 위한 자살'에 관한 논의에서는 "공리주의"와 "의무론"의 대립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이 질문에 대하여 공리주의는 강경한yes이고 의무론의 입장에서는 강경한no가 될 수 밖에 없다. 저자는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상식적인 선에서도 적절한 합의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이의 "동의"가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동의는 무지의 상태에서 감정적인 ok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와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충분히 이해한 상태에서의 동의"를 뜻한다. 저자는 이러한 동의의 절차가 거쳐지고 나서야 그러한 자살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선택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저자의 의견에 나도 동의하며, 가치판단이 모호한 선택지들에 대해서는 행위의 합리성보다도 행위에 대한 사회정서 및 도덕성이 선택의 기로에서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밖에 없음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책을 거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철학적 논의라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대강 알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 할 수 있겠다.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시절과 비교하여 철학에서 다루는 주제는 훨씬 다양하고 그 깊이도 훨씬 심오해졌으나, 그 방식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고 생각한다.(물론 기호논리학이 등장하면서 근대 철학은 수학의 한 분야로 생각될 정도로 수학의 영향을 크게 받긴 하지만.) 개념(Concept)에 대한 정의역(Domain)이 정해져있고, 그로부터 도출되는 정의(Definition)의 명확함을 바탕으로 특정 명제에 대한 논리적 타당성(Validity)을 판단하는 과정인, 대체로 구문론(Syntax)에 가까운 '수학적 논의'와 달리 개념의 정의역이 실제 세계를 넘어서있는 철학적 논의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질문과 답변의 끊임없는 연결고리 안에서 나타나는 '모호한' 개념들을 보완하거나 변경하는 과정이기에(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생각이다.) 의미론(Semantics)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수학을 공부하는 나로서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자주 답답함을 느꼈다.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서 정의역이 형(Form)을 초월한다는 것을 상상한다는 것은 저자의 입장에서 "나 자신이 죽은 상태"를 상상하는 것 만큼이나 수월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제와서 이 책을 추천한다고 하면 그 이유는 아마도 이 책이 여러분에게 내가 했던 생각들만큼이나 자질구레한 생각들을 한 번 쯤은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상 두루뭉술한 잡소리였고, 비판은 기꺼이 환영한다.